악순환에서 벗어나기

by 거북이

퇴근 길, 친구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친구는 오랫동안 직장생활로 지쳐있다 자기계발 휴직중에 있습니다. 어쩐지 동병상련의 기분으로, 씁쓸한 제 기분을 알아 줄 것도 같았습니다.


친구와 저는 형제자매가 많았고, 교회에 다녀본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었지요. 같은 직장까지 다니는 걸 보면 보통 인연이 아닌 듯 합니다. 햇수로는 약 25년지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이것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외로워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저는 사람들과 연결감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변에 있었지만 진심을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배움중에 이것이 ‘아주 어린시절 선명한 어떤 사건들에 의해 형성’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부터의 영향은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는 것, 연락이 오는 것도 모두 부담으로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카톡이 와도 며칠 뒤에 확인하는 등등 약속시간이 다가오면 초조하고 갑자기 일이 생겨 못나간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제 무의식 중에 숨겨져 있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일기장에 ‘외롭다’고 고민을 적었더니 담임선생님께서 일기장 검사를 하시면서 ‘먼저 친구에게 다가가 사귀자고 해봐’ 라고 친절한 코멘트를 달아 주신 기억이 납니다.)


처음 친구에게 이 비밀을 털어놓고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꺼내놓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25여년동안 ‘친구’라고 해놓고서는 ‘사실 너를 믿을 수가 없어. 나는 너를 신뢰하지 않아’라고 말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제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 사람들도 저를 많이 좋아해주고 있는 듯 한데 무슨 소리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왜 가까이에 있는 좋은 사람들과 관계 유지에 신경쓰지 않고, 독서모임이나 세미나 같은 곳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느냐고.


특히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 성도들과의 모임에 더 힘써야하는 것 아니냐고요. 즉, 친구는 가까운 곳에서 배움이 있고 진리가 있는데 왜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친구의 말에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왜 나는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독서모임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그리고 나서 ‘교회’라는 단어가 친구와 나에게 달리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단어를 말하지만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친구에게 있어 교회란 정겨운 곳이며 희망적인 단어입니다. 친구는 대학교 때 종교 동아리 활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교회라는 곳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란, 가고싶을 때 언제든지 갈 수 있으며, 또래 친구들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입니다.


반면 저에게 교회란, 사람은 많이 모일지라도 고독하며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일요일마다 자동차를 타고 부모님과 함께, 가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 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목사님 설교말씀만 겨우 듣고 나와야 했기에 교회안 또래 친구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목사님 말씀 듣는게 너무 좋습니다. 지금은 귀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중학생 때, 교회 간다고 말하고 배회하다가 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오후에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집으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아버지가 집전화를 받으셨지요. 저는 교회에 가지 않은 것을 들키고 말았고 아버지께 종아리를 회초리로 호되게 맞았던 기억이 납니다.


‘직장상사’ 라는 단어도 ‘교회’라는 단어처럼 친구와 제가 달리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직장상사’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친구는 ‘한 조직을 지탱하는 리더’이며 ‘고마움과 감사’의 존재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사정상 친구네 어머니 혼자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는데, 어린시절부터 그런 씩씩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친구는 직장상사와도 거리낌 없는 관계를 맺었습니다.


친구에게 있어 직장상사는 한 조직을 지탱하고 이끄는 ‘리더’이며, 고단하지만 자식들을 위해 수고하는 고마운 ‘어머니’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친구는 직장 상사에게도 ‘아니오’라고 말해야 했을 때 당당하게 자기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엄격한 통제형 아버지 밑에서 자란 저에게 ‘직장상사’란 억압과 명령, 지시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저는 눈치를 보았고, 그런 눈치를 보는 모습이 또 상사에게는 믿음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간섭과 통제의 유발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라오면서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랬는데 직장이라는 곳이 또 그 연장이라니, 저는 오랜 동안 마음속으로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혈연지간 아버지라면 자식을 교육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엄했을 수도 있겠다, 라고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타인인 직장상사들에게는 ‘직원을 이용하고 노예처럼 부려먹는다’라는 프레임까지 덧씌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놀라운 점은, 형제자매중 저만 유독 이런 인식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같은 환경과 조건에서 자란다 할 지라도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큰 언니나 작은언니, 남동생은 모두 인싸입니다. 친구들과 모임도 많고 성격도 매우 쾌활하지요.) 환경적 요인도 있지만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기질도 현재 모습에 영향을 주는 듯합니다.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훌륭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으며,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자신을 믿어주는 단 한명의 지지자가 있다면 그 아이는 잘 자랄 수 있다, 와 같은 실험 연구결과와 같은 것들은 평소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었지요.


하지만 그것들은 실제 제 경험으로는 생생하게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었습니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같은 말을 들어도 사람마다 다르게 들릴 수 있다’ 라는 경험이 나의 실재 사례로 다가오자, 저에게 두가지 새로운 시선이 생겨났습니다.


첫 번째는 정말 사람마다 다 다를 수도 있겠구나, 똑같은 말을 들어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수도 있겠구나! 그러하니 그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얼마나 특별한 존재일 수 있는가, 라는 그 고유성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표현해야 하는 거구나를 느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전혀 이해할 수도 없겠구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12월 4일 회의가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회의장에서 사람들이 왜 공모사업을 추진해놓고 왜 이것밖에는 예산을 안 세워주냐고 화를 냈었던 것은... 서로간에 돈에 대한 듣기의 배경이 달라서 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친구와 내가 교회와 직장 상사에 대한 단어의 다르게 다가왔던 것처럼.


예산편성시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는 것을 이 분들은 어쩌면 ‘자신들이 존중받지 못했다’ 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회사의 방향과 맞지 않고 시대와 상황의 흐름이 바뀌어서인데도.


또한, 회사는 공모사업에 위원들이 회의에 참여하는 과정 그 자체로 이 사업은 의의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위원들은 결과(예산편성율)만을 이 사업의 목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타협과 합의되지 않는 과거의 기준으로.


‘과거’만을 되풀이하며 말했고 ‘지금’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기준으로만 바라보니 우리 회사가 잘못된 것, 틀린 것으로만 비춰졌을 것입니다.


잘못되고 틀린 것으로만 보게 되니, 개선할 ‘미래’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온통 뜯어 고쳐 바로잡아야만 하는 단점들만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협력이 절실한데도... 서로 경쟁해야 하며 총을 겨눠야할 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제 저는 지난 1년간 ‘내가 어떻게 일했는데...’ 라며 이에 대해 알아주지 못한다고 섭섭하다고 말하는 것을 멈추려고 합니다. 2시간동안 비난만 했던 위원들의 배경에는 제가 ‘어떻게 일했는지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으니까요.


또한 회의가 그렇게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었던 회의장의 많은 사람들을 원망했지만 이제는 연민으로 가져갑니다.


위압적인 그날의 회의 분위기속에서 마음속으로 충분히 팀장님과 저를 안타까워 하시는 분들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용기를 내서 회사측에서도 우선순위가 있는데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손들고 말씀해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세에 눌려 별 효과는 없었지만.


누군가가 총대를 매겠다고 말하는 목소리 큰 선동자가 나타나면 그것에 의존하면서, 그것이 강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을 연민합니다. 팀장님과 저의 편을 들어 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그 사정들을 연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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