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희 (사피엔스) 작가님께서는 오랜 시간 함께한 자가용을 애도하며 떠나보내는 글을 쓰셨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노후폐차’라고 4글자로 간단하게 끝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20여년간 작가님과 함께했던 2650(차량번호)은 200자 원고지 48매의 긴호흡을 가진 생명체로 거듭났습니다.
저는 보일러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13년전쯤, 신혼집에 들어가면서 보일러도 새로 들였습니다. 평소 잔고장도 없이 잘 사용했는데, 급작스레 준비없는 이별을 맞이 하고 말았습니다. 10년 넘은 보일러를 친환경 보일러로 교체하면 선착순 정부지원금도 받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덜컥 고장나고 말아 이런 정보도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조만간 11월 수능도 다가오니 날씨는 쌀쌀해져만 가고, 당장 샤워와 머리감기가 곤혹스러웠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집에 있는 주전자와 냄비를 총동원해 4식구가 사용할 물을 가스불에 뎁혀 사용하는데 영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운명을 다하여 차갑게 식은 보일러 앞에서 저는 질문했습니다. ‘사계절 내내 추위 걱정없이 따뜻한 물을 아낌없이 공급해 준 너를, 우리들은 어찌하여 10년 넘도록 너의 존재를 까마득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것일까?' 보일러에게 때늦은 고마움을 느꼈고 동시에 미안해졌습니다.
보일러는 운명을 다하여 쓸모가 없어지면서 비로소 자기 존재를 드러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집안 베란다 컴컴한 한 구석에서 잘 작동되고 굴러갔기에 그랬습니다. 누군가 봐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고 성가시지 않아서. 그래서 더더욱 우리 가족들은 보일러를 평소 인식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10년을 말썽없이 잘 작동 해준 보일러는 없어지면서 비로소 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저는 비로소 이 세상에는 자기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나중에야 가장 빛나는 것들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너무나 흔하고 익숙해서 제가 평소에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렸습니다.
유아차에 쌔근쌔근 잠든 아기들을 살찌운다는 바람, 햇빛... 동네 작은 공원의 나무들, 그 나무위에서 제멋대로 지저귀는 작은 새들...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공기, 물. 풍경을 볼 수 있는 사람 신체의 눈, 들을 수 있는 귀, 움직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움직이는 팔과 다리...
더 나아가, 평소 어쩌면 귀찮게 느껴지기도 하고 지긋지긋해 했던 것들도 생각해내었습니다.
가장 많이 함께하고 가장 많이 지긋지긋해하는 것들. 결코 내가 먼저 떠나 보내지도 않고 반대편에서도 떠나가지 않는 것들.
몸과 마음은 천근만근인 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자 마자 드러눕고 싶은 날, '엄마, 이거 사주세요.' '엄마 여기 봐주세요.' 하고 엄마를 찾는 아이들의 목마른 목소리들. 월요병이 도지지만, 내 인생을 월급(돈)하고 맞바꾼다는 생각을 하며 꾸역꾸역 다니고 있는 직장이 당장 떠오릅니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있기에 저는 밥의 힘(밥심)으로 일을 하고, 꾸역꾸역 다니는 직장이 있기에 가족들과 함께 여름 휴가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피아노 학원비를, 태권도 학원비를 낼 수 있습니다. 다음 계절에는 입을 수 없을 정도로 쑤욱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옷을 사줄 수 있습니다.
너무 흔하디 흔해서 특별해 보이지 않았던 것들. 그래서 소중한 것들. 없어지면 그때서야 비로소 그리워 질 것들. 그래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눈에 잘 띄지 않고 꼭꼭 숨어 있는 것들. 애써 찾아내야 알 수 있는 것들. 그래서 눈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것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어쩌면 나 자신이 누군가의 물, 공기, 햇빛일 수도 있지 않을까도 감히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