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다이어리에 남아 있는 향기

< 사랑은 길고양이처럼> 44화

by 양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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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어느 날 불쑥

다이어리 한 장에 숨어 있다.

단어 사이에 머물던 향기와 시선,

그 작은 흔적들이 다시 너를 데려온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아주 오래된 다이어리를 발견했어요. 표지엔 작은 흠집이 나 있었고, 모서리는 다소 닳아 있었지만, 손끝으로 그 질감을 느끼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뭉클해졌어요. 먼지를 살짝 털고 펼쳐보니,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그 안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더군요.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마치 타임캡슐을 열어보는 것처럼 잊고 있던 순간들이 살아났어요. 당신과 함께한 계절, 함께 걸었던 골목길, 그리고 그날의 온도와 감정들까지.


특히 페이지 사이에 은은하게 남아 있는 향기가 내 마음을 가장 먼저 건드렸어요. 그건 우리가 처음 함께 갔던 카페에서 당신이 즐겨 마시던 라떼의 향이었을지도 모르고, 당신의 스웨터에 배어 있던 섬유유연제의 향일지도 모르겠어요. 그저 잉크 냄새가 섞인 종이의 오래된 향기일 뿐인데, 나는 자꾸만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기억나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당신은 품에 책을 안고 있었죠.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었어요. 책갈피를 끼운 채 접어둔 페이지를 보여주며 당신이 말했죠. “죽음은 삶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이다.” 그 문장을 읊는 당신의 목소리, 그 조용한 울림이 나를 멈춰 세웠어요. 나는 한동안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죠. 그리고 문득, 사랑도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끝나버린 것 같지만, 실은 여전히 내 삶 어딘가에 조용히 함께하고 있는 감정. 당신은 그렇게, 나의 일부가 되어 있었어요.


첫 데이트 날 마셨던 커피 맛, 바람이 차가웠던 어느 밤 당신이 던졌던 농담, 벚꽃이 흩날리던 날 함께 걷던 산책길. 우리는 유난히 카페를 좋아했죠. 서울의 오래된 북카페, 제주도 바다가 보이던 작은 찻집, 그리고 비 오는 날, 조용히 앉아 있던 지하 카페. 그 순간마다 나는 당신을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사랑이란 건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이런 평범하고 작은 순간 속에서 깊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요.


어느 페이지를 펼쳤을 때, 한 줄의 메모가 눈에 띄었어요.

“지금, 이 순간이 언젠가 추억이 될 거야.”

그 문장은 당신의 필체로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엔 내가 덧붙여 쓴 문장이 있었어요.

“그때의 너를 기억하는 나로 남고 싶어.”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우리는 그때 정말 몰랐을까요? 이렇게 이 모든 순간이 추억이 될 줄은.


영화 <클래식>을 떠올렸어요.

손예진과 조승우가 서로를 그리워하며 편지를 주고받던 이야기.

그들의 사랑은 시간을 넘어 전달되었고, 우리의 사랑도 어쩌면 그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종이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함께했던 여름, 비 오는 날 빗물 맺힌 유리창 너머로 나눈 대화, 첫눈이 내리던 날 당신이 내 손을 잡아주던 순간까지도.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이어리를 함께 본 날이 기억나요.

작은 서점 안에 있던 조용한 카페. 우리는 각자의 다이어리를 펼쳐놓고, 서로의 시간을 읽어줬죠.

“여기에 우리의 이야기를 다 적어두면 좋겠어.”

그 말에 내가 웃으며 대답했어요.

“그러면 우리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겠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약속을 지키듯 이 글을 쓰고 있어요.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도 다시 떠올라요.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밤새 도시를 걸으며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그들은 말로 사랑을 만들었고, 우리도 그랬죠. 밤하늘 아래서, 골목길에서, 바다 앞에서. 우리는 사랑을 빌려온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문장으로, 우리만의 방식으로 천천히 써 내려가고 있었어요.


시간이 흐르며, 많은 것들이 변했어요.

다이어리에 적었던 약속은 현실이 되지 않았고, 함께 꾸었던 꿈들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겠죠. 하지만 한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떠올려요. 그리고 그 향기 속에서 당신을 느껴요.


나는 여전히 이 다이어리를 간직하고 있어요.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이 향기를 따라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를 품은 채, 이 글을 마칩니다.


사랑의 향기 속에서, 당신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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