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68

침묵하는 지도자들

by 강순흠



여수·순천은 불에 탔다.
진압작전이 완료되었다는 발표와 함께
계엄령은 전국으로 퍼졌다.
군복을 입은 자들이
마당으로, 골목으로, 밭두렁으로 들어왔다.

‘계엄령 특별조사대’라는 붉은 글씨가 걸렸다.
두석이도 예외 없이 조사대에 소환되었다.
강두석은 이미 마음의 각오를 마친 뒤였다.
조사실에서
두석은 수사관과 잠시 말다툼을 벌였다.
“선생이 공산주의자라는 증거는 없어.
하지만 통일을 말했지?”
“…네.”
“그건 국가정책에 위반이야.”
“그렇다면 그 국가정책이 잘못된 겁니다.”
수사관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자살행위야, 선생.
이건 사상이 아니야. 생존의 문제야.”
“생존을 위해
진실을 꺾는다면
그건 사람의 길이 아닙니다.”

어느 새벽. 정보과 사무실에서
두석은 순형과 마주했다.
“내가 자네를 이렇게 마주할 줄은 몰랐지.”
순형은 웃지 않았다.
언제나 농담 섞인 말투였던 그가,
오늘은 담배조차 손에 들지 않았다.
“ 많은 사람들이
이미 전향서에 도장 찍었어.
자네만 남았네.”
두석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전향하면 산다.
자네가 고집만 꺾으면,
지금이라도 내 이름으로 석방시킬 수 있어.”
“두석아. 전향만 하면 돼.
한 줄만 써.
‘본인은 공산주의를 부정하고…’ 그 다음은 내가 써줄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야.”
“그러니까 써!
그럼 풀려난다고!”
두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내가 가르친 건
사상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야.”
“하지만 그게 바로
지금의 죄목이야.
너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통성을 부정했어.”
“나는 정통을 부정한 게 아니라
폭력을 부정한거야.”
순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쥐고 있던 전향서 한 장이
책상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날 밤
두석은 조사실 안 작은 창문 틈으로
군 트럭에 실려가는 젊은이들의 눈빛을 보았다.
묶인 손목,
찢긴 교복,
숨죽인 울음.
그들의 죄는
살고 싶었던 것,
그리고
묻고 싶었던 것이다.
‘왜 이 나라는 질문하는 자를 먼저 죽이는가.’


조사관이 물었다.
“국가를 부정합니까?”
“아닙니다.
국가란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걸 부정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충성합니까?”
“헌법이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면,
충성하겠습니다.”

“…나에게 전향이란
지금까지 가르친 모든 아이들의 삶과 나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완도경찰서 뒤편 마당에선
청년 하나가 두 손이 묶인 채
눈을 가리고 있었다.
“선생님! 강 선생님 계세요?
저, 창길입니다. 창길이…
선생님!”
탕.
총성이 낮게 울렸다.
순형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두석은 고개를 들었다.
“저 청년이
국가를 뒤흔들 자격이 있었을까?”
순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대신 창문을 닫았다.
그것은, 침묵이라는 명령이었다.


조사실의 벽에는
‘반공국민 선언서’와
‘국민헌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하나는 ‘살기 위한 굴복’이었고,
다른 하나는 ‘침묵하는 국가의 구호’였다.
두석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교사요.
무기를 든 적도,
깃발을 든 적도 없소.”
“하지만 가르쳤잖아.
노동자와 농민에게,
자신을 의심하는 법을.”
순형의 말에 두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제 유일한 죄라면…
그 죄로 끝까지 갑시다.”


그날 밤.
두석은 조사실 안 작은 탁자에
연필을 하나 들고 앉았다.
종이 위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가르치고 진실을 알리는 것이
어떤 시대엔
죄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배우길 원하고 진리를 깨우치길 원하는 사람이 있는 한,
나는 다시 칠판 앞에 서겠노라.”
그리고 종이 한 귀퉁이에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눌러 적었다.
강 두 석.


#작가의 말
계엄령이란 말은
질서를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질서가
누군가의 입을 틀어막고,
누군가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질서가 아니라
폭력이다.
누군가는 묻는다.
왜 전향하지 않았느냐고.
왜 그저, 살아남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그는 살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지키고자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시대가 허락하지 않은 꿈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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