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69

국가의 이름으로

by 강순흠


한겨울 초입, 찬 바람이 남도로 흘러들었다.
조사실의 문이 닫힌 그날 이후, 두석은 풀려났다.
그러나 그것은 석방이 아니었다.
집 앞, 골목 어귀, 마을 입구…
낯선 사내들이 눈빛을 숨기지 않고 드나들었다.
그들의 완장엔 붉은 글씨가 선명했다.
“서북청년단”
그들은 평안도에서 내려온 사내들이라 했다.
이북에서 내려온 복수심, 그리고 반공의 신념을 등에 업고
누구보다도 격렬한 충성을 요구했다.
그 겨울, ‘대한청년단’이라는 이름이 들려왔다.
서북청년단과 우익 청년조직들이 하나둘 통합되며
마침내 하나의 이름 아래 모였다.
"대한청년단 "

국민을 위한 방패, 공산을 막는 창이라 불렸다.
그러나 두석은 보았다.
그 창과 방패가 향하는 방향이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양심이었음을.
대한청년단 소속 청년들이
금당도 마을 회관을 불쑥 찾아왔다.
그들은 조용히 들어와
두석의 봉강정을 뒤지고,
책장을 넘기고,
칠판에 적힌 문장을 지웠다.
“농민에게 땅을.”
“문맹을 이긴 자, 자유를 누린다.”
“하늘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질문할 수 있다.”
청년 하나가 물었다.
“이게 다 선생이 쓴 겁니까?”
두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칠판을 바라봤다.
칠판 위, 하얀 분필 가루처럼
두석의 마음도 서서히 흩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마을 몇몇 청년들이 구속되었다.
‘대한청년단 자경단 협조에 따른 조치’라는 발표가 났다.
어느 날 밤,
두석은 우체통 속에 익명의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선생님, 조심하십시오.
젊은이들 사이에 ‘전향하지 않은 교사’로 소문이 났습니다.
서북단 출신 고문관이 선생님 집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청소’ 중입니다.”
쪽지 끝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봉강정을 지키고 싶습니다.”
두석은 그 쪽지를 품에 넣었다.
그리고 곧장 밤례를 찾아 말했다.
“지금은… 아이들을 다시 모을 수 없어.”
밤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에는 언제나처럼 바느질이 들려 있었다.
말 대신, 그녀는 실을 끊었다.
그것은, 기다림이라는 기도의 끈이었다.
며칠 뒤, 동네 우물가에서
두석은 옛 동지 윤 선생의 아내를 만났다.
그녀는 말했다.
“윤 선생… 대한청년단에 가입했어요.
안 그러면 학교를 폐쇄시키겠다고 협박을 받았대요.
우린 아이들을 지켜야 했어요.
그가 나쁜 사람이 된 게 아니에요, 그렇죠?”
두석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은 잇지 못했다.
무언가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건 언어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는 알았다.
지금 이 시대는
사람을 나누는 시대가 아니라,
무너뜨리는 시대라는 것을.
그날 밤,
밤례가 물었다.
“여보, 왜 당신은 그들에게 전향하지 않았어요?”
두석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대답했다.
“내가 그들에게 전향하면,
지금까지 봉강정에서 배우던 그 아이들이
자기 삶을 부정하게 될 거야.
그들한테 미안해서,
그냥… 더는 못하겠더라고.”
밤례는 등을 돌린 채 조용히 울었다.
그 눈물은 소리 없는 저항이었고,
살아남기 위한 순결한 기도였다.

#작가의 말
이 땅에 ‘국가’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많은 일들이 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정의라 불렸고,
어떤 것들은 조용히 묻혔다.
‘대한청년단’은 한때 방패였고, 또 칼이었다.
그러나 그 칼은,
때로는 가장 낮은 곳에서
조용히 삶을 지키려던 이들의 숨을 겨누었다.
역사는 종종 ‘지킨 자’보다
‘말하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로 다시 쓰여야 한다.
두석은 그들의 입에 침묵이 아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주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말의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작가의 이전글노란 개나리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