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75

달빛파도

by 강순흠


금산으로 들어서는 길은
언제나 그리움의 언덕을 건너는 듯했다.
밤례가 친정에 도착했을 때,
노모는 잠시 멈칫하다 품에 안겼다.
“아가, 어쩐 일이냐.
산 너머도 넘긴 사람 얼굴 같구나…”
초췌한 얼굴에 묵은 세월이 눌러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방 안에서 기침을 했다.
밤례는 물 한 바가지 떠다 드리고,
가만히 아버지 손을 쥐었다.
그 밤,
식구들이 잠든 뒤
밤례는 다시 바깥을 향해 나섰다.

풀숲을 헤치고
비밀처럼 얽힌 오솔길을 따라
그녀는 조심히 걸었다.
작은 소나무를 돌아
바위 밑 움막 앞에 섰을 때,
희미한 등불 하나가 불그스레 빛나고 있었다.
“밤례요.”
한마디를 던지자
낡은 문짝이 열렸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두석은 눈에 서린 그리움으로 그녀를 안았다.
한 마디 말보다 먼저
숨이 닿았고,
온기가 전해졌다.
“살아있었소…
그것만으로…”

그들은 밤중에 움막을 내려왔다.
마을이 잠든 그 시각,
두 사람은 파도 소리를 따라 바닷가로 향했다.
젖은 모래 위,
두 발자국이 나란히 찍혔다.
그때였다.
멀리 바다 건너,
금당도 위로 둥근 보름달이 떠올랐다.
하늘에서 떨어진 듯,
너른 달빛이 바다를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두석은 갯바위에 앉아
긴 대나무 장대를 바닷물에 그었다.
그 장대 끝에서
달빛이 반짝 터졌다.
“저기 봐요.
마치 바다가… 불을 머금은 듯하오.”
달빛이 출렁이는 파도 위에
살아있는 생물처럼
황홀한 빛들이 춤을 추었다.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겠구려.”
“아니오. 아직… 아직 우리, 살아있소.”

그들은 나란히 앉아
고요한 달빛을 바라보았다.
그 빛 너머로
검은 실루엣 같은 그림자가
멀리멀리 따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청년단, 수배령, 감시, 조국의 시련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그림자조차
달빛 아래선 말없이 고요해졌다.
“밤례.”
“……예?”
“나는 그대 덕에 버텼소.
사람으로, 남편으로, 아비로…
살아낼 수 있었던 건, 그대가 있었기에.”
밤례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두석의 눈빛이
달빛보다 더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밤례는 그의 가슴을 두 손으로 짚고
소리 없는 오열을 터뜨렸다.
“왜 꼭… 이렇게 살아야 했을까요…
왜, 당신은 늘 쫓기고…
늘 목숨을 걸고 살아야 했는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녀의 흐느낌이 파도에 섞여
멀리 흩어졌다.

두 사람은 긴 밤을 걸었다.
봉강정 마당에서 처음 마주한 날,
함께 심었던 노란 개나리,
야학을 위해 글자를 가르치던 시간들,
여인으로서 아내로서
그가 곁에 있어준 모든 순간들…
“우린… 함께했소.
그거면 된 것이오.”
“그럼, 이 밤도… 함께 있어줘요.
끝이 언제든…”

#작가의 말
달빛은
가장 고요한 순간에도
그들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투명했고,
그래서 더욱 슬펐습니다.
살아있기에 아프고,
기억하기에 아름다웠던 밤.

한밤중 바다 위에서 춤추던 달빛 파도
그 앞에 선 두 사람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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