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78

봉강정(鳳江亭)의 이름으로

by 강순흠



주민들의 탄원서가 지서로 쏟아지다

금당 마을 어귀에
새벽 안개가 걷히기도 전
풍문처럼 퍼진 소식.
“두석 선생이 잡혀갔단다…”
“여순사건이니 뭐니… 지서에 갇혔다더라…”
순식간에 마을은 술렁였다.
소안도에서부터 함께 했던 동지들,
야학에서 글을 배웠던 아이들과 청년들,
문맹을 벗고 손주들에게 편지를 쓰던 노인들.
그들의 마음은 쾅, 쾅 울렸다.
“그 분은 그런 분이 아니야.”
“글을 가르치고, 씨를 나눠주고, 세상을 일깨운 분이야.”
“우린 그 양반에게 빚졌지. 말이 아니라, 삶을 배운 거야.”

하루도 지나지 않아,
금당지서에는 자필 탄원서가 쌓이기 시작했다.
검게 묻은 손톱 끝, 굳은살 박힌 손으로
마을 사람들이 한 자, 한 자 눌러 썼다.
“강두석은 죄가 없습니다.
그는 평생을 백성을 위해 헌신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우리에게 책을 나눠주고, 논밭을 갈아주었습니다.”
“그를 공산당으로 모는 것은 하늘을 가리는 짓입니다.”
장터에서, 우체국 앞에서,
심지어는 마을 어귀 돌담 밑에서
낮게, 그러나 뜨겁게 탄원서가 쓰여졌다.
어떤 이는 한글을 몰라,
아들딸을 시켜 받아 적게 했다.


“우리는 강두석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지금도 이름 석 자 쓰지 못했을 사람들입니다.
비바람 몰아치는 겨울밤, 선생은 폐허가 된 서당에 등잔불을 밝히며
글을 가르치셨고, 밥 한 그릇 아끼며 아이들에게 먹이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이 나라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애국자가 있다면,
그 이름은 ‘강두석’입니다.”
-금당도 야학 졸업생 일동-


“그는 논밭이 사라진 이들에게 씨앗을 나눠주고,
가뭄이 들면 함께 우물터를 파던 사람이었습니다.
추운겨울 땔감을 나눠주고,
자신의 장갑을 벗어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분을 여순사건 주동자로 몰아가는 것은
진실을 질식시키는 폭력입니다.
우리는 결단코 그 죄목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금당면 노농회 대표-


“강 선생님은 우리에게 ‘바다만 먹고 살 것’이 아니라
‘글도 배우고, 권리도 찾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무릎이 성할 날이 없는 우리들에게
자신은 늘 ‘무릎 꿇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 나라는 누구 덕에 세워지나이까.
우리가 살 수 있었던 건
그 양반의 말 한 마디, 손 한 번 덕이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그 분은 이 땅을 밝히는 등불이었습니다.”
-금당도 부녀회-


“그는 신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처럼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예수의 가르침처럼,
자신을 배신한 자마저 용서한 분입니다.”
“십자가 없는 시대에
그 분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온 선지자였습니다.
제발, 이 시대가 그 분을 못 박지 말게 하소서.”
-금당교회 교우 일동-



“선생님은 우리에게 말하셨습니다.
‘배우는 건 네 몸값을 높이기 위한 게 아니라
네 이웃과 똑같이 숨 쉬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배웠습니다.
단지 글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법을 말입니다.”
-강두석의 제자 일동-



금당지서 우편실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하루에도 수백통씩
‘강두석 선생의 무죄를 호소하는 탄원서’가
도착한 것이다.
도장이 찍힌 문서도 있었고,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글씨로 꾹꾹 눌러쓴 편지도 있었다.
지서장은 탄원서를 던지듯 내팽개쳤다.
“이게 뭔 소란이야!
이 나라가 민중의 말에 휘둘리는 동네 깡패 모임인가!”
그러자 젊은 순경 하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지금까지… 온 서신 수가…
벌써 수백 통을 넘겼습니다.
읍내 주민들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서장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돋았다.
“이 강두석이… 대체 어떤 놈이기에,
백성이 이토록 따르지?”

그 무렵,
밤례는 두석을 만나기 위해
지서 문 앞까지 찾아왔다.
“한 번만, 뵙게 해주십시오.
아내가 아니고… 그냥, 그냥 사람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면회는 거부당했고,
지서 앞에는 총을 든 군인 두 명이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밤례는 문 앞 돌계단에 앉아
가만히 기다렸다.
뭔가라도 느껴지기를,
그의 기척이라도 들리기를.
그날 밤,
밤례는 조용히
자신도 한 통의 탄원서를 남겼다.
“그 사람은, 제 남편입니다.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수많은 가난한 영혼들에게 희망이었던 사람입니다.
어떤 잉크로도, 그 손을 붉게 물들일 수는 없습니다.”

#작가의 말
독재는 종종
칼과 총으로 나라를 지키려 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진실은
백 사람의 기억 위에서 살아난다.
지금,
강두석이라는 이름은
단죄의 대상이 아니라,
민중의 심장에 새겨진 연대의 상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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