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79

국민회 깃발 아래 – 친구를 팔고 얻은 것

by 강순흠


낮게 깔린 새벽 안개가 골짜기를 메웠다.
그 안개 속에 마당을 가로질러 선 순형의 등뒤로, 영재가 다가왔다.
그의 외투 깃은 새로 달아낸 듯 빳빳했고, 허리춤에는 경찰서에서 받은 신분증이 살짝 비죽이 나와 있었다.
“두석이는 아직 숨이 붙어 있나?”
영재가 물었다.
순형은 담배를 비벼 끄며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나도… 이럴 줄은 몰랐다.”
영재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는 눈물도, 떨림도 없었다.
바람결에 희미한 국밥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여 코끝을 스쳤다.
멀리서 ‘국민회’ 깃발이 나부끼는 게 보였다. 새로 달아 올린 현판에는 영재의 이름이 굵게 새겨질 터였다.
“나 이제 위원장 소리 듣게 됐네.”
영재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 입가에 번진 웃음이, 순형의 속을 뒤엎었다.
“너도 봤잖아. 저 놈이 언제부터 우리랑 달라졌는지.
문맹 없애자고? 계몽한다고? 그 꼴로 있으니까 빨갱이 소리 듣는 거야.
이 판국에 저런 놈 하나 없어진다고 세상 안 뒤집혀. 오히려 편해져.”
순형은 벽에 기대선 채 주머니 속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총을 꺼내 영재의 이마에 겨눌 수 있었다.
하지만 총알이 아까웠다.
“순형아, 우린 살아야지 않냐. 살아남아야지.
이제 애들도 키워야 하고, 논도 지켜야 하고, 말이야.”
영재는 변명하듯 뱉었다.

그 순간 유치장 너머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곰죽은 듯 눕혀둔 두석이 기척을 낸 것이었다.
순형은 담장을 넘어 유치장으로 발을 들였다.
영재는 따라오지 않았다.
발소리를 죽여 마루 끝에 다가서자, 두석의 마른 입술이 겨우 움직였다.
“순형… 순형아…”
순형은 무릎을 꿇고 두석의 손을 잡았다.
온기없는 차가운 손이었다.
“영재… 영재는…”
두석이 끝내 묻지 못한 말을, 순형은 알아들었다.
한때 똑같이 초가집 마당에서 글을 읽던 동무.
빛 한 점 없는 방에서 부지런히 등잔을 지펴주던 친구.
그리고 지금은, 국민회 깃발 아래 앉아 친구를 팔아먹은 유지.
“너 대신 내가 본다. 걱정 말고 가.”
순형은 두석의 손을 이마에 대고 눈을 감았다.
두석의 입가에, 마치 봄눈 같은 미소가 번졌다.

밖으로 나와보니, 영재는 국민회 깃발아래서 벌써 사람들을 모아놓고 있었다.
‘우리 마을은 이제 안전합니다.’
‘공산 잔당은 뿌리 뽑혔습니다.’
저 쓸개 빠진 연설에, 박수까지 터졌다.
순형은 주머니 속 총의 무게를 느끼며, 허탈하게 웃었다.
저 깃발 아래서, 저 놈은 평생을 살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똑같이 팔릴 것이다.
누군가 또다시 더 큰 깃발을 흔드는 날이 오면.

그 즈음, 뜻밖의 소문이 돌았다.
마을을 넘어 읍내, 그리고 군청으로.
몇몇 우익 유지들이 지서장을 찾아와
낯빛을 바꿔가며 입을 열었다.
“강두석이, 저 사람은 좀 달라.
비록 그쪽 색깔이라 하나…
이런 말 내가 해서 뭐하겠나만,
그 사람만은 죽이면 안 돼.”
“공산이니 뭐니 몰라도
그 양반은 사람을 살린 사람이야. 백성들한테 무조건 밥부터 주던 양반이었어. 우리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데, 그런 사람부터 죽이면 뭐가 남겠나.”
지서장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그 말들을 듣고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살아남기 위해 빨갱이를 쓸어내라던 상부의 지시와,
지서 앞에 쌓여가는 수백 통의 탄원서,
그리고 이제는 우익 유지들까지 입을 모아
‘강두석만은…’이라 하는 현실.
하룻밤에도 수십 번,
지서장의 손에선 탄원서가 구겨졌다 펴졌다.



#작가의 말
해방의 빛은 때로 가장 어두운 그늘을 품었습니다.
친구였으나 친구를 팔아 살아남은 사람,
믿었으나 믿음을 버려야 했던 사람,
그리고 끝까지 등을 돌리지 못한 사람.
탄압은 진실을 가두려 하지만,
민중의 기억은 벽을 넘는다.
이 이야기가 비추는 건, 결국 그 시대를 살아낸 평범한 사람들의 비루함과 눈물입니다.
영재가 얻은 국민회 깃발은 두석의 죽음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 깃발이 몇 해나 바람을 견딜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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