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무대 위에서, 목소리를 낸다는 것
광주제일고등학교 강당.
마룻바닥에 먹을 들인 무대 커튼 뒤편에서 학생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1947년 9월. 좌우합작 논의가 팽팽히 이어지던 해,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광복의 의미를 다시 묻는 혼란이 교실 밖으로 스며들던 때였다. 그러나 그날, 학생들 사이에는 어쩐지 풋풋한 긴장과 들뜬 설렘이 감돌고 있었다.
"이번 발표 순서, 강군수! 무대 앞으로 준비해."
마이크 앞에 선 강군수는 숨을 가다듬었다. 검정 교복 단추를 끝까지 잠근 그의 손에는, 밤을 새워 쓴 원고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이번에 발표할 주제는 ‘새로운 나라의 방향’. 좌우합작, 자주민족통일, 자치정부… 누구는 미군정의 잔재라 하고, 누구는 공산주의의 침투라며 입씨름을 벌이던 시대였다. 하지만 군수의 발표문은 조금 달랐다.
“우리는 서로를 믿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다름은 적이 아닙니다. 서로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학생들의 눈빛이 집중되자 그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선생님, 그리고 학우 여러분.
저는 오늘, ‘우리의 광복과 새로운 길’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단단했다.
"재작년,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빨리 알게 되었습니다.
미군정은 친일 경찰을 다시 세웠고, 인민위원회는 해산되었습니다.
좌와 우는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고, 진짜 해방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강당의 공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또렷하고, 분명했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민족의 자존을 위해 서로를 적으로 보지 않고, 진정한 ‘합작’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제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옳은가보다, 누가 옳은가를 따지기 시작하면, 역사는 눈을 감는다.'고.
저는, 해방이 우리 손에 온 진정한 기회라면, 그 기회를 지키는 것도 우리 세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웅성거리던 학생들이 잠잠해졌다. 군수는 마지막 문장을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교우 여러분.
저는 이 길을 혼자 걷고 싶지 않습니다.
책 속의 자유 말고, 교정의 바람 속에서 서로 손잡고 나아가는 자유를 원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꿈꿨던 ‘조선의 아침’ 아닙니까?"
작은 박수 소리로 시작된 반응은 점차 강당을 가득 채웠다. 뒤에서 무대를 바라보던 여학생, 소희의 눈이 군수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좇았다.
그날 밤, 발표회가 끝난 뒤 강당 옆 도서실 문 앞에서 마주친 둘은 어색한 침묵을 나눴다.
소희는 작게 인사했고, 군수는 수줍게 웃었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만나 조선어 관련 자료를 함께 찾다가 손끝이 스친 기억, 눈이 마주쳤을 때의 고요한 떨림… 소희는 자신도 모르게 군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발표가 끝난 뒤, 그는 무대에서 내려와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비비던 그에게 소희가 다가왔다.
“아버지 말씀… 참 좋았어요.”
“정말요?”
“응. 진정한 합작. 우리시대의 몫. 뭔가... 우리 둘도 조금 그런가 싶었어요. 서로 잘 모르니까.”
군수는 그 말에 얼어붙은 듯 웃었다. 열여섯살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시대의 갈등보다 더 복잡한 감정이 웅크리고 있었고, 그 감정이 지금, 눈동자 안에 피어나고 있었다.
“그럼… 다음엔 내가 그림자 비춰줄게요. 나, 학교 연극반이에요. 조만간 연습하러 올래요?”
“나, 연극은 잘 모르는데…”
“괜찮아요. 나도 처음엔 말도 잘 못했어요. 대신… 그냥 같이 있어줘요.”
소희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었다. 그 미소가 동백꽃처럼 강렬했다. 군수는 대답 대신, 목덜미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밖에는 첫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날 밤, 군수는 공책에 이런 문장을 써내려갔다.
“이 눈이 녹아도 그 애의 미소는 남을 것이다. 내 청춘의 가장 붉은 장면으로.”
그리고 그렇게, 이 불안정한 시대 한가운데에서, 단단한 말과 조용한 미소로 두 사람의 봄은 시작되고 있었다.
#작가의 말
한 시대를 꿰뚫는 용기는 반드시 거창한 행동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혼란과 대립의 시대에 한 학생이 쥐고 있던 연설문 한 장,
그 속에 깃든 사유와 말의 힘이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를 우리는 종종 잊는다.
해방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1947년.
좌우합작, 민족통일, 진보와 보수, 외세와 자주라는 이름 아래
조선을 다시 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누군가는 또박또박 자기 생각을 말하고,
누군가는 조용히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핀 동백은 그런 시절, 청춘과 사랑, 신념이 교차하는 이야기다.
군수라는 이름을 지닌 이 청년이, 아버지 강두석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역사의 바람을 맞이하고 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청춘은 늘 시대를 넘어 가장 순수한 진실을 품고 있기에,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시대의 혼란은 불가피하지만, 사랑과 깨어있는 마음은 언제나 다시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