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잎 위의 그림자
"너, 어젯밤에 그 이야기 들었어?"
하굣길, 학교 앞 골목의 찻집에서 흘러나온 라디오 소리에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어디선가 또 ‘빨갱이’가 붙잡혔대.”
“이젠 그런 말도 조심해야 돼.”
“아냐, 우리 아빠 말로는 죄다 소련 사주받은 사람들이래. 하나도 믿지 말래.”
군수는 책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말없이 지나쳤다. 가로등도 켜지지 않은 오후 늦은 골목, 머릿속은 소희의 얼굴로 가득했다.
소희의 눈동자는 아직 군수의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광주 시내의 늦가을은 유난히 맑았다. 종종 불어오는 찬바람에 은행잎이 휘날리고, 문화회관 담장을 따라선 철쭉 잎도 바스락거렸다.
군수는 소희와 약속한 시간보다 이십 분이나 일찍 나와 있었다. 기다림의 초조함보다 그녀를 생각하는 기쁨이 컸다. 그는 손에 아버지 두석이 보던 낡고 헤진 ‘민중의 역사’를 들고 있었고, 소희를 보며 한 번쯤 얘기하고 싶었던 문장이 접힌 책갈피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군수오빠, 많이 기다리셨죠?”
소희가 숨을 고르며 다가왔다. 머플러에 얼굴을 묻은 채, 수줍은 듯 웃는 모습이 말간 초겨울 햇살에 물들었다.
군수는 책을 가방에 넣으며 웃었다.
“아니. 방금 도착했어. 오늘도 도서관 가는 길이지?”
“응. 그 전에 같이 찻집 잠깐 들를래요? 따뜻한 유자차 마시고 싶어요.”
두 사람은 시내 골목길에 자리한 ‘무궁화 다방’으로 들어섰다. 창가에 앉은 소희는 책상 위에 놓인 군수의 책 제목을 힐끗 바라봤다.
“민중의 역사이라… 군수오빠, 점점 더 어려운 책 읽네요.”
“읽을수록… 어른들 말씀이 맞단 생각도 들어. 세상은 이상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니까.”
소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다방 입구에 누군가 들어섰다. 검은 코트를 입은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안경 너머로 안을 훑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소희야.”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소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 여기엔 어떻게…”
소희의 아버지, 김창우는 우익 계열의 지역 인사로, 광주 시내 유지이자 반공청년단 운영에 깊숙이 개입된 인물이었다.
그는 소희 옆에 앉아 있는 군수를 노려봤다.
“자넨 누구지?”
“저는… 강군수라고 합니다. 학생입니다.”
김창우는 군수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 속에서 떠올리려는 듯 잠시 멈췄다. 그러다 책상 위에 놓인 군수의 책을 집어 들었다.
“민중의 역사 …?”
김창우의 눈이 번뜩였다.
“이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우리 딸을 만났단 말인가.”
군수가 말하려는 찰나, 김창우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 세상이 지금 얼마나 혼란한지 모르는가? 요즘 같은 때엔, 책 하나, 말 한마디가 목숨을 좌우해.”
그는 책을 천천히 덮고, 다시 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딸과는 오늘로 그만하게. 다시 만나는 일은 없어야 하네.”
소희가 당황스레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군수오빠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냥 공부를…”
“입 다물어라.”
김창우는 분명하고 낮게 말했다.
“내가 너를 지키기 위해서다. 지금은… 마음이 전부가 아니다. 정신 차려야 해.”
군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읽던 책이 손에 쥔 칼날처럼 느껴졌다.
소희는 울먹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수오빠… 나중에, 꼭 얘기해요. 그때 우리가 진심이었는지…”
둘은 그날, 헤어졌다.
말없이, 아무 약속 없이.
거리의 동백나무 아래, 바람에 한 잎 동백잎이 떨어졌다. 그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붉게 피어오르던 사랑은, 그 날 한순간, 동백잎 위에 가늘게 부서졌다.
#작가의 말
역사는 때로 사랑보다 무거운 무게로 젊은이들을 짓눌렀다.
한 권의 책, 한마디 말, 한 번의 시선이 이념의 혐의가 되었고, 사랑은 그 이념 사이에서 가장 먼저 단절되곤 했다.
좌익과 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해방 공간, 두 젊은이의 사랑이 겪는 시대적 비극을 상징한다.
군수는 여전히 사랑을 품고 있었으나, 현실은 사랑을 향한 발걸음에 철문을 내려다 걸었다.
평화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이념은 일상을 갈라놓고, 사람들의 사랑과 꿈조차 파고들었다.
군수는 그런 시대 한복판에서 첫사랑의 설렘과, 그 시대가 허락하지 않는 경계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일지라도, 마음은 피어난다. 마치 동백꽃처럼, 가장 차가운 계절에도 붉게.
하지만 기억하자.
그 철문은 언젠가 다시 열린다.
사랑은, 그리고 동백은, 다시 피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