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8

바람 속의 균열

by 강순흠


광주의 겨울은 눈보다 바람이 먼저 찾아온다. 마른 풀잎 사이로 스산하게 스며드는 찬 기운이 어깨를 으쓱이게 하는 1948년 1월의 끝자락. 군수는 학교 뒤편 교목원 길을 따라 조용히 걷고 있었다. 손에는 얇은 책 한 권, 이기영의 《서화》가 들려 있었다.
“요즘 왜 연락을 안 해요?”
낯익은 목소리에 돌아보니 소희였다. 교복 위에 베이지색 외투를 여민 그녀가, 아련히 웃고 있었다.
군수는 멈칫했다. 지난 며칠, 소희 아버지와의 만남 이후 그는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었다.
“소희야... 미안하다.”
“오빠가 왜 미안해요? 미안한 건 난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는 대답 대신 책을 조심스레 소매에 감췄다. 그러나 소희의 눈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책... 보여줘요.”

군수는 소책자를 꺼내 조심스레 펼쳤다. 제목은 서화(書話). 이기영이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엮은 책자였다. 해방 후 다시 나온 재판본으로, 그는 글 하나하나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어가고 있었다.
“이거, 이기영 선생님 글이야?”
소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농민의 현실을 누구보다 절절히 아시는 분이야. 이기영은 ‘고향’, ‘서화’, 그리고 ‘민촌일기’를 통해 그 민중의 피와 땀이 어떻게 착취당했는지를 낱낱이 드러냈지. 이 ‘서화’에는 그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가 품었던 꿈이 담겨 있어.”
그는 책장을 넘기며 한 문장을 짚었다.
‘나는 붓을 들기 전에 그 붓이 농민의 눈물이 되어야 함을 먼저 생각한다.’
소희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농민의 눈물이라… 그래서 선생님은 글을 무기처럼 쓰셨던 걸까.”
“맞아.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고, 그걸 어떻게든 드러내려 한 거지. 그게 바로 진짜 글쟁이의 자세 아닐까 싶어.”
소희는 한참 책 속 글귀를 들여다보다 말했다.
“그럼에도 그분의 글이 우리 아버지에겐 ‘불온’하다고 들릴 수도 있겠네.”
군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인정해. 지금 시대는 편을 나눠 싸우는 중이니까. 누군가에겐 이 책이 진실을 비추는 등불일 수 있지만, 또 누군가에겐 체제를 흔드는 불씨처럼 느껴질 테니까.”
소희는 군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좋아해. 두려움 없이 불의를 드러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국엔 세상을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을까.”
군수의 눈빛이 부드럽게 물들었다.
“너의 그 말, 내가 평생 잊지 않을게.”
창밖에는 아직도 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고 있었고, 그날 그들의 대화는, 계절보다 더 깊고 진지하게 서로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가로지르듯, 어디선가 굵고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돌아보았고, 낯빛이 굳어졌다. 소희의 아버지, 김창우였다.
그는 완장도 두르지 않았고, 군복도 아니었지만, 말없이 뿜어내는 기운만으로도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다.
“이 자식이 아직도 우리 딸 주변을 어슬렁거리네.”
김창우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군수는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군수입니다. 인사드립니다.”
“그 입 닫아라.”
그의 눈은 곧장 군수의 손을 훑었다.
“그거, 뭐냐.”
“… 그냥 책입니다. 조선 소설…”
김창우는 성큼 다가와 군수의 손에서 책을 낚아챘다. 표지를 보자, 짧은 숨을 들이켰다.
“이기영? 허허, 좌익문학?”
군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소설이라니까요…”
“지금 이게 소설이냐? 이딴 것 들고 다니면서 내 딸을 만나? 지금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나라가 무슨 꼴로 가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나?”
그는 책을 바닥에 내던지며 군수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소희. 지금 당장 이 녀석이랑 끝내라. 다시는 만나지도 말고. 이따위 빨갱이 냄새나는 놈하고 어울리다간, 나중에 네 인생 망가진다.”
소희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천천히 다가와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다.
“아버지, 그런 말씀… 너무해요.”
김창우는 딸을 노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넌 아직 몰라.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름답지 않다. 그 책 한 권이, 네가 평생 누릴 수 있는 안전을 앗아갈 수도 있어.”
그는 마지막으로 군수를 짧게 노려보더니, 돌아섰다. 소희는 울음을 참듯 고개를 푹 숙였고, 군수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책을 주워 품에 안았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군수는 처음으로 느꼈다.
‘사상’이라는 단어가 사람 사이의 골을 어떻게 갈라놓는지를.
그리고, 이 바람 속에서 피어오르던 연분홍 첫사랑이 이제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작가의 말
해방된 땅 위에 다시 피어난 민족의 숨결은 아직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 땅의 하늘에는 '해방'이라는 이름의 빛과, '분단'이라는 이름의 그늘이 동시에 드리우고 있었지요. 좌우 이념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동족 간에 총부리를 겨누는 예감이 서서히 짙어져 가던 그 시기. 사랑조차, 우정조차, 교육조차 사상의 색깔에 따라 검열받고 단죄되던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군수와 소희의 만남이 정치와 이념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시험대에 오르고 말았습니다. 소희의 아버지는 '우익' 인사로서, 군수에게 분명한 적의를 드러냅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감정이 아닌, 당시 수많은 가정과 이웃들이 겪은 실제 갈등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이념이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고, 사랑마저 금지의 대상이 되던 시절. 우리는 그 속에서 인물들이 끝까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또한 얼마나 단단한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군수와 소희의 사랑은 흔들리지만, 아직 꺼지지 않은 불꽃처럼 작고도 단단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이 이야기가 지향하는 한 줄기 희망입니다.
‘사랑’이, ‘사상’보다 먼저 말 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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