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11

곤고지산의 울음

by 강순흠


1947년 5. 1메이데이 집회와 48년도 단정반대 집회 후
초여름 약산의 햇살은 아직 이르렀고, 산등성이엔 봄이 머물러 있었다. 약산면 면사무소 앞 공터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남루한 작업복, 밀짚모자, 바랜 저고리. 그들의 어깨에는 분노와 절망이 내려앉아 있었고, 눈동자에는 기어이 살아보려는 불꽃이 꿈틀거렸다.
“오늘은 우리 손으로 말해야 한다!”
장정 몇이 손에 손을 잡고, 손수 만든 붉은 천을 높이 들었다.
"식량을 내놓으라! 토지를 돌려달라! 미군정 타도!"
울컥울컥 터져 나오는 구호. 주동자 중 하나였던 신정남은 목소리를 더 높였다.
“해방된 지가 얼만디, 왜 우리는 전보다 더 굶어야 한당가!”
그날의 집회는 피를 부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를 민중이라 불렀고, 이 땅의 주인이라 외쳤다. 조용히 눈시울 붉힌 이들도 있었고, 주먹을 불끈 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구호는 곧 "불온한 외침"으로 기록되었다.

며칠 뒤, 약산지서, 그리고 곤고지산
그날 집회 후 주동자 명단이 만들어졌다. 미군정의 감시망, 경찰의 첩보, 우익 청년단의 내통으로 수십여 명의 이름이 ‘불온세력’으로 분류됐다.
그중 신정남, 권길용, 임남효 등은 도망쳤다. 곤고지산, 약산도의 깊은 숲, 검은 산이라 불리던 그곳으로.
“여그서 며칠만 숨으면, 길이 보일 거여... 아무리 세상이 어지럽고 무섭더라도 살아서 진실을 말 해야해...”
그들은 밤마다 숯불로 고구마를 구워 먹었고, 조용히 시를 읊기도 했다. 한밤, 빗속에서도 불빛을 끄지 않았다.
그러나 곧 토벌대가 꾸려졌다.
경찰, 의용경찰, 우익청년단, 그리고 같은 마을 사람들로 조직된 ‘자위 토벌대’. 그들은 “빨갱이 토끼몰이”라 불리는 작전을 개시했다.
“발각되면 다 죽인다. 말도 마라, 잡히면 심문이고 뭐고 없이 총살이여...”

곤고지산 토벌 작전,
산은 거대한 감옥이 되었고, 그 안에서 며칠을 더 버티던 이들은 하나둘 붙잡히기 시작했다. 신대인은 끝내 산골짜기에서 총상을 입고 사살됐다. 정병주는 항복했지만, ‘빨치산을 도운 자’로 몰려 그를 숨겨준 마을 주민 김삼원 가족까지 연행되었다.
그 중에는 국민학교 교사였던 김도희 선생도 있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저, 그들이 사람이라 밥 한 술 준 것뿐입니다…”
그러나 심문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몇 차례 밤새 고문을 당한 뒤 어깨가 탈골된 채로 돌아왔다.
며칠 후, 약산면 뒷산 공동묘지 근처
여섯 구의 시신이 나란히 발견됐다. 팔은 뒤로 묶였고, 눈은 풀려 있었으며, 몇몇은 총상이 아닌 급하게 목을 맨 흔적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울지도, 소리치지도 않았다.
다만 누군가 마을 회관 벽에 글씨를 남겼다.
“이들은 이 땅의 주인이 되려다 짐승으로 죽었다.”

#작가의 말
“그날 그들은 사람으로 살아보려 했습니다.
이름 없이, 계급 없이, 그저 한 그릇 밥을 위해 외쳤고, 두 발로 산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제도는, 권력은, 역사는 그들을 죄인이라 불렀습니다.
토벌이란 말은 거창하지만, 그것은 곧 ‘말할 권리를 빼앗은 자들의 침묵 강요’였습니다.

약산면 곤고지산 사건은 해방 후 전국 전역에 걸쳐 분출된 농민 운동, 좌익 계열의 조직적 집회 중 하나로, 미군정 및 경찰의 강경 진압과 토벌이 이어진 대표적 사건 중 하나입니다.
당시 좌익계 인물들은 '토지 개혁'과 '반미자주'를 외치며 집회를 열었고, 미군정은 이를 '공산폭동의 전조'로 간주했습니다.

곤고지산 이 산은 기억해야 합니다.
말하지 못한 이들의, 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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