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12

죽은 고요

by 강순흠


완도는 고요했지만, 그 고요는 죽은 고요였다. 해방이 되었지만, 바다는 말이 없었고, 산은 숨어 있었다. 그해 완도경찰서에 한 장의 공문이 도착했다. 좌익세력에 대한 '정밀 색출 및 선제 조치'를 명하는 명령서였다.
완도경찰서장 김두천 경감, 서울 경무서에서 내려온 인물로, 그는 공산주의자에겐 단호했고, 명령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이승만 정권 수립 전야, 좌익 잔재를 제거해야 한다는 ‘작전계획’은 ‘신속하고도 은밀하게’ 집행되어야 했다.
“이번 작전은 민중을 위한 것이다. 국가가 혼란을 겪지 않으려면 독버섯은 뽑아야 돼. 사정은 없다. 보고는 중앙에 바로 올라간다.”
그는 중간 간부 박순철 경사와 고참 순사 최만수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의심 가는 자는 모조리 명단에 올려. 숙소, 인맥, 활동 내용, 단체 기록까지 다 대조해. 그리고...”
“경찰서로 다 이동시켜. 입막음은 내가 책임진다.”

마을은 다시 움츠렸고, 사람들의 말은 짧아졌으며, 눈빛은 벽을 타고 흘렀다.
김두천 경감은 완도경찰서장으로 부임한 이후, 서서히 이곳의 지도를 바꾸어갔다.

“순철이, 3 지구 문서 가져와. 제일 먼저 신지면과 약산면부터 정리한다.”
서장이 박순철 경사에게 말을 던졌다. 그 말은 곧 ‘작전 개시’의 신호였다.
“대상자는 어떻게 선별합니까?”
“ 인민위원회에 관련된 놈들. 집회나 구호 외친 기록 있는 놈들. 공출 반대나 토지 분배 언급한 놈들.”
“기준이 너무... 모호합니다.”
“모호해야 돼. 그래야 도망도 못 간다. 긴가민가한 놈들부터 잡는 거야.”
순사보 박영식은 명단을 받아 들고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종이 위에는 수십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중 세 번째 줄 ‘김만석, 21세, 어업 종사자, 인민위 관련 가능성’
그는 어릴 적 같은 학교에서 뛰놀던 친구였다.
같이 고기 잡고, 바닷가에서 마른 해우(김)와 미역을 나르던 친구였다.
박영식은 손끝이 저려오는 걸 느끼며 조용히 물었다.
“...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최만수 고참 순사가 짧게 쏘아붙였다.
“영식이 너, 나라 지키는 거 안 하고 싶냐?”
“... 저 사람들은 아직 아무 죄도—”
“이 새끼야, 그런 소리 하다 너도 명단에 올라. 정신 똑바로 차려.”
그날 밤.
토벌대는 3개 조로 나뉘어 약산도 외곽의 곤고지산 줄기 일대로 투입되었다.
달빛도 숨을 죽인 듯 흐렸다.
무장 순사들은 기척 없는 밤의 어둠 속을 헤매며, 풀썩이는 낙엽 소리에도 방아쇠를 걸었다.
“지서로 다 데려가.”
김두천의 지시대로, 붙잡힌 이들은 약산지서로 끌려갔다.
거기엔 울타리도, 군사법정도, 판결문도 없었다.
다만 ‘이 나라를 위한 정리’라는 말이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누구랑 같이 있었지?”
“저는… 그냥 멸치 말리러… 산에… 형님은 병들어서…”
“거짓말이 통할 것 같아? 얘, 최 순사. 입 좀 다물게 해.”
총성이 났다.
바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회 주동자로 수배된 이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토벌대가 들이닥친 뒤의 일이었다.
마을은 봉쇄되었고, 산자락은 연기로 가득 찼다.
그중 한 사람, 김현태.
그는 젊은 농사꾼이자, 좌익 활동을 함께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조용했던 이였다.
도망치지 않았다.
다만 곤고지산 골짜기에 들어가 스스로를 가뒀다.
밤마다 그는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달빛에 손을 뻗었다.
"왜 싸운 거였지? 밥이었나? 아버지의 땅이었나?"
그의 발 밑엔 이틀 전 잡은 산토끼의 피자국이 말라 있었다.
지금은 동료도 없고, 무장도 없고, 깃발도 없다.
다만 조용히,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과 비명.
그는 짐작했다. 누군가는 이미 잡혔고, 누군가는 이름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비 내리는 밤, 현태는 마른나무껍질을 벗기며 조용히 읊조렸다.
“우리는... 바람 속에 뿌린 씨앗이었을 뿐이었나…”


약산면 장용리 해변가, 그리고 옆 동네의 약산초등학교 뒤편 야산.
그날은 무더웠다. 숨조차 끊길 듯한 햇빛 아래, 바닷가엔 파도도 닿지 않는 것처럼 고요했다.
“이놈들, 내려! 한 줄로 세워!”
완도경찰서 토벌조는 포박된 채 트럭에 실려온 이들을 차례차례 끌어내렸다.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줄줄이 끌려왔다.
탕! 탕! 탕!

한편, 옆 동산의 그늘진 숲길 어귀.
권길용은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기 앞에 놓인 땅이 바로 자신의 무덤이 될 줄 알았을까.
"이 사람들은... 정식 재판도 없고, 죄도...!"
고함을 지르려는 찰나, 권총의 개머리판이 그의 턱을 강타했다.
"시끄러워. 입 다물어. 여긴 재판소가 아니야."
“사격 준비!”
순사 최만수가 무전기를 던지듯 내려놓고는 바로 명령을 내렸다.
총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총앞에 선 사람들의 다리는, 이미 무릎이 꺾인 지 오래였다.
탕! 탕! 탕!
짧고 가벼운 세 발의 총성.
그 사이로, 병석이의 눈동자가 하늘을 향해 멈췄다.
탕! 탕!
정남이와 대인이.
형제의 순서도, 나이도, 이 땅에선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죽었고, 바다는 그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정병주가 끌려갈 때, 그의 아내는 멀리 산 너머 마을에 있었다.
훗날 그녀는 남편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
다만 그날 밤, 꿈에 남편이 나타났다고 했다.
“자기야… 나 이제 집에 가…”
그는 바지 끝이 젖은 채, 조용히 그렇게 말했다고.


# 작가의 말
역사란, 늘 '당위'의 이름으로 인간을 외면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 당위는 ‘국가’, ‘질서’, ‘안보’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반대편에는 항상 한 사람의 이름이 지워진다.
경찰이 모두 악인은 아니었다.
많은 하급 순사들은 망설였다.
두려워했고, 명령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 모두를 ‘가해자’라 남겼고, 희생자들은 이름조차 모른 채 사라졌다.

이름 없는 해변, 숫자로 바뀐 생명들.
우리는 여전히 묻지 못한 질문들이 있다.
왜 죽어야 했는가.
왜 두 손이 묶인 채 그늘 아래 쓰러져야 했는가.
왜 이 나라의 첫 아침은 총성과 함께 시작되었는가.
기록이 남지 않았다면, 이 죽음도 잊혔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름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차양우, 이정동, 김찬직, 김광선,....,
그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아직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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