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13

광주, 졸업식 날

by 강순흠


햇살이 유난히도 밝았던 2월의 아침이었다. 광주의 겨울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하굣길 은행나무 가지마다 매달린 얼음은 어느덧 녹기 시작했고, 흙먼지 이는 운동장 가장자리 담장 아래에선 동백꽃이 붉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군수는 재킷 단추를 바짝 여며 쥐고 교정 한복판에 서 있었다. 졸업식이 곧 시작될 참이었다. 옷깃 너머로 날아드는 찬바람 사이로 사람들의 소곤거림이 섞여 들었다.
“48년에는 통일 정부가 생길까?”, “인민위원회 얘기는 아예 금기어라더군.” 선생님들조차도 교정 구석에서 이마를 맞대고 시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당으로 들어서자 나무바닥이 삐걱거렸다. 군수의 손은 떨렸고, 마음 한켠은 묘한 허전함으로 출렁였다. 이 졸업식이 단순한 통과의례가 아니라, 세상의 혼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걸음 같았기 때문이었다.

교장선생님은 회색 개량한복 차림으로 연단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어조는 다소 느렸다.
“여러분. 우리는 해방을 맞았으나 아직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단의 기운이 거세지고, 좌우의 대립이 민심을 찢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부디, 바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자라주시길 바랍니다. 그게 나라를 지키는 길입니다.”
군수는 그 말에 묘한 전율을 느꼈다. "바른 눈", "용기", "나라"... 평소엔 딱딱한 훈시쯤으로 들릴 법한 말들이, 이제는 마치 자신의 삶에 내린 지침처럼 느껴졌다.
뒤이어, 2학년 대표인 조길환 후배가 연단에 올라 후배들의 축사를 낭독했다. 목소리는 앳되었으나 그 속엔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

“선배님들, 우리가 함께 걸었던 그 복도, 우리가 함께 웃었던 그 마당을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 떠나시는 그 길이 외롭지 않기를. 졸업생 선배님들의 걸음 하나하나가 이 땅의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 해방된 조국은 아직 혼란스럽지만, 선배님들께선 어둠을 뚫고 걸어가 주십시오. 우리는 뒤에서 바라보며, 그 길을 따르겠습니다.

그 순간 군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뒤에서 바라보던 소희의 눈빛이 떠올랐다. 같은 반도 아니었지만 도서실에서 마주친 몇 차례의 우연한 인사, 운동장에서 나눴던 짧은 시선. 그녀는 한때 군수의 가슴을 떨리게 한 후배였다. 그의 아버지를 알고 나서부터 군수는 일부러 눈을 피했다. 그녀도 그걸 느낀 듯, 어느새 말이 사라졌다.
‘만약 우리가 정치도, 계급도, 그 어떤 색깔도 없이 만났더라면…’
군수는 혼잣말을 삼키며 다시 눈을 떴다.

졸업생 대표로 군수가 단상에 올랐다. 잠시 마이크가 지지직거렸다. 강당은 숨을 죽인 듯 조용했다. 군수는 또렷이 말했다.

“저희는 이 교정에서, 글을 배웠고 사람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배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이 조국은 아직 미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따라, 참된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민족을 배반하지 않고,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이곳에서 배운 것을 등에 지고, 진실을 향해 걷겠습니다. 그것이 조국을 위한 길이라 믿습니다.”

잠시 정적. 그리고, 뜨겁지 않지만 조용한 박수 소리가 강당을 메웠다.
졸업식이 끝난 뒤, 군수는 학교 교정 가장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돌아봤다. 담장 아래, 붉은 동백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 나무 아래에서 봄을 기다리는 꽃처럼, 그도 이 나라의 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버지 강두석이 계신 그곳.
하지만 이제, 군수도 세상을 피하기보다, 이해하고 기록하고, 그 곁에 서야겠다고 군수는 결심했다.
그해 봄, 한 청년이 어른이 되어가는 첫 발자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작가의 말
1948년은 격변의 해였습니다. 단정 수립과 좌우 갈등, 민중의 분열과 지리산의 총성, 여순 사건의 전조가 들끓던 그해, 한 소년이 졸업식장을 나섰습니다. 그의 이름은 '강군수'.
해방된 나라에서 되려 더 깊어지는 억압의 정조 속에 서 있었습니다.
아버지 강두석은 민족의 해방을 꿈꾸었지만, 해방 이후에도 '사상'은 자유롭지 못했고, 오히려 더 정밀한 검열과 탄압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군수는 그 시대 속에서 '사상의 유산'을 물려받은 존재였습니다. 피가 아니라, 신념과 시대의 상처가 그의 졸업장을 적셨습니다.
그의 시점에서 시대를 바라보는 감수성과 혼란, 그리고 소희라는 첫사랑을 통해 교차되는 이념의 장벽과 인간적 갈등, 졸업식의 축사와 훈시는 단순한 의례가 아닌, 당시의 정치적 열기와 교육 현장의 이념 지형을 반영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역사의 윤리를 배워야 하는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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