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14

불타는 섬, 흔들리는 마음

by 강순흠


1948년 봄, 군수는 졸업장을 가슴에 품고 고향 금당도로 향했다. 여객선이 완도항을 떠나 바다를 가르자, 어렴풋이 보이던 섬들이 점점 윤곽을 드러냈다. 청청하던 하늘 아래 펼쳐진 바다는 평화로웠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언제 터질지 모를 불안이 숨죽여 흐르고 있었다.
금당도 앞바다에 배가 다다르자, 섬사람들의 손짓과 해풍에 실린 갯내음이 그의 가슴을 울렸다. 마중 나온 어머니 밤례는 검은 두루마기를 여미며 아들을 껴안았다. “고생했다, 군수야.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
군수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꾹 참았다. 어머니의 손등엔 고단한 세월의 주름이 새겨져 있었고, 눈가엔 잠들지 못한 밤들이 그려져 있었다.
마을엔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모두가 인사를 하면서도 눈치를 보았고, 골목 어귀에서 두런거리던 이들은 누군가가 다가오면 입을 다물었다.

얼마 후, 군수는 우연히 남도 신문을 접했다. ‘제주도 무장대의 봉기’ 붉은 글씨가 눈을 찔렀다. 그리고 경찰의 토벌작전, 마을 단위의 소탕, 잔혹한 진압의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제주도에서 난리가 났단다.” 아버지 두석의 친구이자, 마을의 한 선생이 조용히 말했다. “미군정이 손을 놓은 사이, 토벌대가 말도 못하게 사람을 죽인다더구먼.”

1948년 4월 3일, 제주.
“폭도 토벌”이란 이름으로 시작된 진압은, 들불처럼 번졌다.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한 이들이 죽었다. 빨갱이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 사람들까지 총에 쓰러졌다. 사람들은 말했다.
"하룻밤 사이에 마을이 사라졌다고."
"아이 울음소리가 끊겼단 말이여."
"자기네 동네 사람인데도, 아무 말도 못 해. 멋모르고 빨갱이라 쐈다는디, "

군수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람결에 섬의 갈대가 흔들리는 소리조차 숨죽이는 비명처럼 들렸다. 그날 밤, 그는 마을 뒷산 장군바위 너머로 올라갔다. 고향의 불빛들이 흐릿하게 반짝였다. 그런데 남쪽 하늘 어딘가, 희미하게 붉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이 불꽃인지, 마음속의 상념인지 알 수 없었다.
‘왜 사람들은 총을 들게 되었을까?’
군수는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조선은 해방되었지만, 어디에서도 진정한 자유는 보이지 않았다. 친일 경찰은 그대로 경찰이었고, 좌익은 반역자로 몰렸으며, 사람들은 기회주의자들을 따라갔다. 소리 없는 전쟁이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군수야, 우리도 언젠가는 그 바람 속으로 끌려들겠지?”
금당도에서 군수가 가장 신뢰하던 친구 재복이 어둑한 저녁, 함께 소주를 마시다 말했다.
“이 바다 건너 제주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 섬까지 안 올 거라 생각하면 안 돼. 누가 빨갱인지, 누가 우익인지 그건 이제 총 든 놈 마음이야.”
군수는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깊은 쓴물이 가슴을 타고 내려갔다.

군수는 그날 밤, 고향 마루 끝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졸업식 날, 소희가 건네주지 못한 편지를 품 속에서 꺼냈다. 낡은 봉투에 적힌 글씨는 소희의 것이었다.
"이념은 사람보다 앞서선 안 돼요. 나는 여전히 당신을 믿습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이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길 바랍니다. 우리 길은 다르지만, 마음은 진실이었기를."
소희는 우익 집안의 딸이었다. 그의 이름은 이제 신문에 종종 오르내렸다. 민청단 후신, 국민보도연맹 조직을 돕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와 군수, 서로의 인연, 시대는 그들을 엇갈리게 했다.
"내가 멈춘 사이, 시대는 뛰어가버렸구나..."
군수는 혼잣말처럼 중얼였다.

그 시절, 금당도의 밤은 고요했다. 누군가는 삶을 쥐고, 누군가는 희망을 빌었다.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을 말하지 않았지만, 바람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
세상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어도 바다는 늘 제 할 일을 했다. 갈매기 소리, 김 굽는 연기, 소년들이 돌을 튀기며 소리치던 포구. 거기에도 삶이 있었다.
며칠 뒤, 뭍에서 돌아온 아버지 두석이 중얼거렸다. “여수에서 뭔가 일어날 것 같다. 그들의 분노가 너무 깊다.”
그 말은 곧 예언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봄. 모든 것이 피어나는 듯하지만, 실상은 꺾이고 시들 준비를 하고 있는 계절이었다.

#작가의 말
제주 4.3 사건은 1948년 3월부터 시작된 국가폭력의 비극이자,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싼 치열한 갈등의 출발점이었다. 그 비극이 닿기 전, 금당도에 불안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총칼 없이도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했고,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시대였다.
군수는 두 눈으로 봤습니다. 역사가 어떻게 일상을 스며드는지. 그리고 결국, 그 일상이 누군가의 최후가 되는 순간을.
삶은 그렇게, 봄빛 아래에서도 불안했고, 불빛 아래에서도 눈물 젖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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