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21

보리 한 되 사건

by 강순흠


1949년 8월, 완도 금당 가학리.
여름 저녁은 눅눅했고, 산허리에는 안개가 걸려 있었다.
이흥주는 해변 자갈밭에서 대나무 김발을 치고 있었다. 갯바위 위에서 작대기를 짚고 숨을 돌리다 문득 멀리 보이는 불빛을 보았다. 그것은 들불이 아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조심스레 가려진 횃불.
그 불빛이 있는 곳에는 산으로 숨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해방 직후 마을 인민위원회에 참여했던 사람들, 통일정부 수립에 앞장섰던 청년들, 일제 때 경찰에 맞서 싸웠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들의 이름 옆에는 ‘좌익’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제주 사건과 여순사건을 겪으면서
“빨갱이 색출”이라는 명목 아래 경찰이 수차례 마을을 뒤졌고, 이미 몇몇은 고문 끝에 죽거나 감옥에 끌려갔다. 남은 사람들은 가족을 두고 밤중에 산으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산속에서의 삶은 곧 지옥이었다.
여름이면 습기 찬 토굴에서 모기와 뱀을 피해 잠을 자야 했고, 겨울이면 얼어붙은 나무껍질을 씹으며 버텨야 했다. 가장 큰 적은 허기였다. 며칠씩 아무것도 먹지 못하면 서로의 눈빛마저 야위어졌다. 산길에서 죽은 동지를 묻을 때, 그 얼굴에는 단지 굶주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밤, 옆집 김정암이 이흥주를 불렀다.
“저 사람들, 사람이라기보다… 그림자 같아. 뼈만 남았더군. 보리 한 되씩만 걷어다 줍시다. 그래야 목숨이라도 붙잡지.”
이흥주는 가슴이 철렁했다. 경찰이 알면 ‘빨갱이 동조자’로 몰려 자신과 가족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내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저 사람들도 우리 마을 사람이야. 굶어 죽게 둘 거요?”
다음 날, 마을 곳곳에서 몰래 보리 한 되씩 모아졌다.
어린 전수남은 아버지 몰래 작은 주머니를 들고 김정암에게 건넸다.
“아버지한테 혼나도 돼요. 이거, 산에 계신 큰아버지 주려고요.”
김정암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짙은 불안이 어른거렸다.
삼일 뒤 새벽, 그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나와! 전부 나와라!”
총부리를 든 경찰들이 마을을 포위했다. 사람들은 잠옷 차림으로 끌려 나왔고, 아이들은 울부짖었다.
한 경찰관이 소리쳤다.
“보리 준 놈들, 다 나와! 아니면 다같이 죽는다!”
이흥주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새끼줄이 그의 팔을 파고들며 살이 터졌다. 김정암은 체포되면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죄는 나 하나다. 다른 사람들은 건드리지 마라.”
그의 목소리는 이내 들려온 총성에 묻혔다.




#작가의 말
보리 한 되 사건은 완도의 한 바닷가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당시 농어촌 사회가 안고 있던 생존의 절박함과 권력의 횡포가 그대로 녹아 있다. 보리 한 되, 그 한 되의 무게는 단순한 보리알이 아니라 쫓기는 사람들의 생명을 버티게 해 줄 숨구멍이었다.

이 이야기는 특정 이념의 옳고 그름을 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김정암의 죽음, 이흥주의 절규, 전수남의 눈물 속에
우리 모두가 마주해야 할 '진실의 무게'가 묻어 있습니다.

완도 바다에 스민 피는 지금도,
'우리는 과연 같은 사람인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역사를 쓰다 보면 종종 느낀다. 큰 전쟁과 혁명, 거대한 정치변동만이 역사의 재료가 아니라, 이름 없이 사라진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과 눈물, 작은 마을의 소동이 모여 역사의 흐름을 이룬다는 것을. 보리 한 되 사건은 바로 그런 이야기다.

역사의 아픔을 소설로 풀어내며,
"적대는 진실을 마주할 때만 해체된다"는 신념으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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