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24

고금도의 첫 번째 불꽃

by 강순흠


1948년 3월 7일, 완도 고금도.
해질 무렵, 세동리 뒷산 굴 속에서 이규설이 손전등을 켰다. 노란 불빛이 축축한 바위 벽면을 훑자, 이미 모여 있던 스물여덟 명의 얼굴이 드러났다.
"백 명은커녕 삼십 명도 안 됐군."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아홉 시 사십오 분. 지금이라도 계획을 접어야 할지 갈등이 인다.
"규설 형, 그래도 해야 합니다."
황정우가 다가섰다. 스물다섯 청년의 눈에는 두려움 대신 분노가 번뜩였다.
"김 서장이 내일 아침 세동리 주민 열두 명을 처형한다는 거, 다들 알잖습니까. 아무것도 안 하면, 그게 더 죄예요."
굴 안은 술렁였다. 누군가는 중얼거렸다.
"이미 경찰이 낌새 챈 거 아냐…"
이규설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며칠 전 고금지서 지하에서 본 광경이 떠올랐다. 쇠사슬에 묶여 피투성이가 된 동네 사람들, 그중에는 열여섯 소녀도 있었다. 발목이 꺾인 채 웅크린 몸. 그 눈빛이 아직도 떠나지 않는다.
"그래 간다."
이규설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숨소리마저 잦아들었다.
"규칙은 하나. 살아서 꼭 돌아오기다."
그는 허리춤에서 낡은 8연발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오래전 일본군에게서 빼앗아 둔 전리품이었다.
"새벽 세 시 정각, 정문과 뒷문을 동시에 친다. 지하감옥 열쇠는 서장실 책상 서랍에 있다. 십 분 안에 끝내고 흩어지는 거다."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들 사이로, 열여덟 살 박창수의 떨리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창수야, 넌 뒤에서 지켜라."
"안 됩니다! 저도 갑니다!"
창수는 주머니에서 조잡한 권총을 꺼냈다. 오래돼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무기였다.
"아버지를 경찰이 발목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졌대요. …저도 해야 해요."
이규설은 말없이 창수의 어깨를 두드리고 굴을 나섰다.
밤의 고금도는 죽은 듯 고요했다. 그들은 그림자처럼 골목을 타고 지서 쪽으로 움직였다. 새벽 두 시 오십오 분, 각자 자리에 섰다.
이규설은 숨을 고르다 문득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너무 조용했다.
경비병 둘이 순찰할 시각인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함정…?"
그때, 지서 2층 창문에서 번쩍 빛이 튀었다.
탕!
이규설은 몸을 굴렸다. 머리 위로 총탄이 스쳤다.
"내려!"
외침과 동시에 정문이 열리며 경찰 십여 명이 쏟아져 나왔다.
"빨갱이 놈들 쏴라!"
총성이 비 오듯 쏟아졌다. 황정우가 옆에서 몸을 날리며 경찰 하나를 쓰러뜨렸다.
"규설 형! 지하감옥부터!"
이규설은 피 흥건한 복도를 내달렸다. 뒤에서 창수가 복부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이 스쳤다.
"형님… 지하…"
창수의 손짓을 뒤로한 채, 이규설은 철문 앞에 섰다. 방아쇠를 당겨 자물쇠를 깨부수고 문을 열었다.
썩은 공기 속에 쇠사슬 묶인 열두 주민이 웅크려 있었다. 안상수가 고개를 들었다.
"형님… 왜…"
사슬을 풀려던 순간, 위에서 굉음이 울렸다.
우르릉—!
수류탄 폭발에 천장이 흔들리며 무너져 내렸다. 이규설은 본능적으로 안상수를 덮쳤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등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형님! 일어나요!"
안상수가 부축했지만, 복도 끝에서 경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안 되겠다… 너희만 나가라."
이규설은 리볼버를 안상수 손에 쥐여줬다.
"다섯 발 남았다. 앞으로 쏘며 나가라."
"형님은요?"
그는 등을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난 뒤를 맡는다."
이규설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고향을… 부탁한다."

#작가의 말
역사의 그림자는 길고, 그 속에서 스러진 이름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습니다.
1948년 고금지서 습격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그 시대에 실제로 무수한 이들이 겪었던 현실의 조각들입니다.
"왜 총을 들었을까?"
이념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이규설, 황정우, 박창수, 안상수, 이름 하나하나가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서 발견한 실제 희생자들의 삶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이념 때문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이 죽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절망 때문이었습니다.
"과거를 마주하는 용기만이 미래의 재앙을 막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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