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25

피로 물든 새벽

by 강순흠


1948년 3월 8일, 새벽 4시 17분.
고금지서 지하감옥에서 터져 나온 폭발음이 마을 전체를 뒤흔들었다. 흙먼지가 하늘로 솟구치고, 건물의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며 새벽의 정적이 깨졌다.
안상수는 이규설의 리볼버를 꽉 쥔 채 복도를 내달렸다. 머리 위로 시멘트 조각들이 쏟아져 내리며 그의 어깨와 등을 후려쳤다.
"형님들! 어서 이쪽으로!"
그의 외침에 쇠사슬에 묶여 있던 주민들이 비틀거리며 따라 나왔다. 모두 발목에 피멍이 들어 있었고, 얼굴은 고문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해방된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탕! 탕!
복도 끝에서 경찰 두 명이 총을 난사했다. 총알이 벽을 파고들며 석회 가루가 흩날렸다. 상수는 본능적으로 벽에 몸을 붙였다.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평생 총을 잡아본 적 없는 스무 살 청년. 그러나 이 순간, 망설임은 죽음을 의미했다.
‘규설 형님이 말했지… 앞으로 쏘면서 나가라고.’
상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방아쇠를 당겼다.
탕!
예상보다 더 큰 반동이 손목을 때렸다. 눈을 뜨자 경찰 한 명이 벽에 기대어 주저앉으며 피를 토했다. 상수는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몸이 얼어붙었다.
“저… 저기다!”
한 노인이 쇠사슬을 끌며 뒷문을 가리켰다. 상수는 이성을 잃은 듯 사람들을 밀어내듯 이끌었다.
지서 뒷문을 박차고 나오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그러나 숨 돌릴 틈도 없었다.
우르르릉——!
이번엔 2층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불길이 창문 밖으로 튀어나왔다. 건물은 붉은 불빛에 휩싸였고, 고금지서는 붕괴 직전처럼 흔들렸다.
“규설 형님…?”
상수가 뒤돌아보려는 순간, 거칠게 팔을 잡아 끄는 손이 있었다.
“가자! 어서 가!”
황정우였다. 왼팔은 총알에 꿰뚫려 피가 흘러내렸고, 오른손엔 이미 의식을 잃은 박창수를 업고 있었다.
“규설 형은? 형님, 규설 형은 어디에…?”
“너만이라도 살아야 한다고…”
황정우의 목소리는 울먹였고, 눈에는 핏물이 고여 있었다. 상수는 더 이상 묻지 못했다.
그들은 지서 뒤편 골목으로 몸을 던졌다. 계획대로라면 두어 명씩 흩어져야 했지만, 이미 늦었다.
탕! 탕! 탕!
사방에서 총성이 쏟아졌다. 총알이 벽을 스치며 파편이 튀었고, 주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차례차례 쓰러졌다.
“포위당했어!”
황정우가 이를 갈며 외쳤다. 상수는 그와 함께 쓰레기 더미 뒤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품에 업혀 있던 박창수의 몸은 이미 싸늘했다.
황정우가 떨리는 손으로 창수의 눈꺼풀을 내려주었다.
그때, 창수의 주머니에서 흘러나온 것은 낡은 권총과 피 묻은 손수건이었다.
“저기다!”
경찰들의 함성이 점점 가까워졌다. 황정우는 갑자기 상수의 멱살을 붙잡았다.
“너는 꼭 살아서… 세동리로 가라. 내 누나한테 이걸 전해줘.”
그는 가슴에서 피에 젖은 손수건을 꺼내 상수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형제들아, 죽어도 굴하지 말라…”
“정우 형님!”
상수가 붙잡으려 했지만, 황정우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골목 밖으로 뛰쳐나갔다.
탕! 탕! 탕!
총성이 세 발 연속 울려 퍼졌다.
그리고——
탕!
마지막 한 발.
골목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새벽 5시 03분. 고금도는 피로 젖은 침묵에 잠겼다.
쓰러진 상수의 눈앞에 군화 한 짝이 멈춰 섰다.
“이거 보이냐?”
경찰 김태균이 이규설의 리볼버를 흔들고 있었다.
“네놈들 두목은 이미 끝났어. 그리고…”
그는 상수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 들어 올렸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지서 앞뜰에 널브러진 십여 구의 시체였다.
“이게 너희들이 구출한 사람들의 꼴이다.”
김태균이 귀에 속삭였다.
“다음은 네 차례야, 꼬마야.”


#작가의 말
고금지서 습격의 새벽은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가족과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총을 들었지만, 역사는 그들을 ‘폭도’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폭도’라는 낙인이 아니라,
자식을 구하려다 총을 든 아버지의 심정,
동생을 살리려다 몸을 던진 형의 결심입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 폭력 뒤에 숨겨진 사연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패자의 비명이 사라질 때 진실도 죽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패자의 목소리를 다시 불러내는 작은 불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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