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26

학살의 명단

by 강순흠


1948년 3월 9일, 새벽.
밤새 불길에 휩싸였던 고금지서는 이제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검게 탄 벽돌보다 더 참혹한 것은, 그 뒤로 들이닥친 보복이었다.

마을 어귀로 군용 트럭 세 대가 쏟아져 들어왔다. 총을 든 경찰과 우익 청년단이 마을을 에워쌌다.
“모두 나와! 문 닫아 걸지 마라!”
거친 고함에 주민들은 속옷 차림으로 집 밖으로 내몰렸다. 아이들은 울부짖었고, 노인들은 무릎을 부들부들 떨었다.
김태균 경감은 차갑게 주민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지서 습격에 가담한 놈들이 어디 있나? 어차피 다 알고 있다. 불려 나올 때 순순히 나오면 목숨은 건질 수도 있다.”
말끝마다 총부리가 사람들의 이마에 들이대졌다.

경찰은 마당 한복판에 낡은 책상 하나를 갖다놓았다. 책상 위에는 얇은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펜으로 휘갈겨 쓴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김태균이 종이를 흔들며 말했다.
“이 명단에 있는 놈들은 이미 다 밝혀졌다. 숨어봐야 소용없다. 나오지 않으면 네 이웃이 대신 죽는다.”
주민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종이에 쓰여 있는 이름이 누구인지, 모두의 가슴은 얼어붙은 듯했다.
첫 번째로 불린 이름은 노인 박만수였다.
그는 며칠 전 단지 억류된 아들을 찾아 지서를 기웃거렸다는 이유로 적혀 있었다.
“나는 억울하네…!”
박만수의 절규가 공기 속으로 찢겨나갔다. 그러나 경찰의 손은 이미 그의 팔을 비틀어 끌고 갔다.

그날 아침, 해안가 모래밭에 주민 열네 명이 세워졌다.
그들 중에는 어린아이의 아버지도 있었고, 신혼을 맞은 청년도 있었으며,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교사도 있었다.
손이 등 뒤로 묶였고,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졌다.
바닷바람이 차갑게 불었지만, 이들의 땀은 옷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조국을 배신한 자들에게… 사형을 집행한다.”
김태균의 목소리는 바다보다 차가웠다.
“조준—— 발사!”
탕! 탕! 탕!
총성이 이어졌고, 몸들이 휘청이며 모래 위로 쓰러졌다.
핏물이 스며들어 모래를 적셨다. 갈매기 떼가 놀라 하늘로 흩어졌다.
멀리 숨어 지켜보던 안상수는 온몸이 굳어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총알에 쓰러진 사람들의 얼굴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날 저녁, 마을은 깊은 침묵에 잠겼다.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누군가가 경찰에 정보를 흘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 아무개가 명단을 썼다더라.”
“아니다, 지서에서 강제로 시킨 거란다.”
확실한 것은 없었지만, 의심은 독처럼 번졌다.
이웃은 더 이상 이웃이 아니었다.
모두가 모두를 두려워했다.

안상수는 바닷가 동굴에 몸을 숨겼다.
굶주림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지만, 손에 쥔 물건이 그를 버티게 했다.
황정우가 마지막 순간 건네준, 피 묻은 손수건.
그 안에는 희미하게 글씨가 적혀 있었다.
“죽어도 굴하지 말라.”
안상수는 손수건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형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쓰러져간 사람들의 눈빛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자신에게 살아남아 증언하라고 명령하고 있음을.

#작가의 말
학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그 안에는 이름이 있고, 얼굴이 있고, 가족이 있다.
누군가는 아버지였고,
누군가는 신랑이었으며,
누군가는 아이들의 스승이었다.
총알은 그들의 숨을 끊었지만,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다.
살아남은 자의 침묵은 또 다른 죽음이고,
기억하는 자의 글쓰기는 새로운 삶이다.
역사는 그렇게 다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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