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27

고금지서 2차 습격

by 강순흠


1948년 12월, 여순사건이 터진 지 두 달째.
지리산 깊은 골짜기로 향하던 14 연대 출신 군인 여섯 명은 이미 탈진 상태였다.
눈 덮인 산맥은 먹을 것도, 숨을 곳도 허락하지 않았다.
군경의 토벌대는 매일처럼 포위망을 좁혀왔고, 산속은 더 이상 피난처가 될 수 없었다.
총알은 줄어들었고, 배낭 속 보리쌀도 마지막 한 줌만 남아 있었다.
“이대로는 다 얼어 죽는다.”
정동식의 입술은 파래져 있었고, 말소리조차 떨렸다.
“지리산은 꿈일 뿐이야. 우리 같은 놈들이 버틸 데가 아니야.”
김철우가 나무둥이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박준서가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돌아가자. 고향으로.”
“고향이라고 안전하겠어?”
장현우가 반문했지만, 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안전해서가 아냐.
거긴 우리 부모, 형제, 이웃이 있는 곳이다.
적어도 낯선 산에서 굶어 죽는 것보단… 고향 땅에서 끝장을 보자.”
순간, 모두의 눈빛이 흔들렸다.
고향.
그 단어는 지쳐가던 그들의 가슴에 마지막 불씨를 지폈다.
바닷바람이 매서운 겨울밤, 그들은 낡은 어선을 훔쳐 몰래 바다로 몸을 숨겼다.
거친 파도에 배가 뒤집힐 듯 흔들렸고, 옷은 소금기와 눈보라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뱃머리 너머로 보이는 섬의 윤곽이 조금씩 다가올수록, 그들의 눈빛에는 생기가 돌아왔다.
그곳은 바로, 그들의 마지막 숨구멍 같은 곳이었다.
밤을 틈타 바다를 건너 마을 뒷산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맞닥뜨렸다.
빈집마다 문짝이 부서져 있었고, 마당에는 버려진 신발과 피로 얼룩진 새끼줄이 널려 있었다.

김철우가 허물어진 초가집 안으로 들어서자, 거기에는 바닥까지 번진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벽에는 ‘부역자 가족’이라는 글자가 숯으로 크게 쓰여 있었고, 옆에는 군홧발로 짓밟힌 성경책이 구겨져 있었다.
“여기서… 다 끌려갔구나.”
장현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박준서는 곧장 이웃 노파를 찾아갔다. 노파는 말 대신 손가락으로 지서를 가리켰다.
“단선 단정반대로… 온 마을이 피바다가 됐지. 아버지, 아들, 사위… 죄다 잡혀갔어. 살아 돌아온 사람? 한 명도 없네.”
그 순간, 그들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폭발했다.

그날밤, 버려진 외양간에 모인 여섯 명.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침묵 끝에, 박준서가 칼을 꺼내 땅바닥에 꽂았다.
“여기서 눈감으면, 우리도 공범이다.”
김철우가 손등을 걷어올렸다.
“고문당하다 죽어간 부모와 이웃의 원한을 갚자. 살아 돌아갈 수 없어도 상관없다.”
장현우가 칼을 움켜쥐어 손바닥을 베었다. 피가 바닥으로 흘렀다.
그는 낮게 읊조렸다.
“배신하지 않는다. 끝까지 간다.”
나머지 동지들도 차례로 손을 베어, 흘러내린 피를 서로의 손등 위에 겹쳤다.
붉은 피가 흘러내리며 한 덩어리로 섞였다.
“이제 우린, 하나의 피다.
누가 쓰러져도, 남은 자가 원한을 잇는다.”

그날 밤, 그들은 바닷가에 숨어들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누구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정동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표는 분명하다. 지서 습격, 그리고 복수다.”
멀리서 지서의 등불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빛을 바라보며, 박준서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고향을 피로 물들인 자들,
이제, 우리가 간다.”
그들은 바다 냄새를 가르며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작가의 말
여순사건 이후, 군인들은 단순히 ‘반란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쫓기는 자였고, 동시에 고향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고향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따뜻한 품이 아니라, 학살의 흔적과 부모 형제의 신음이었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고향의 원한을 갚는 것.
그 순간, 그들의 분노는 불꽃이 되어 역사의 한 줄기를 태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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