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28

피의 새벽

by 강순흠



1948년 12월 23일, 새벽을 앞둔 시각.
고금도 어귀의 작은 마을 외곽, 버려진 초가집 안에 모여든 여수 14연대 출신 탈주병들과 청년들이 숨을 죽였다.
비린내 섞인 바닷바람이 틈새로 스며들었지만, 그 누구도 추위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박준서는 바닥에 놓인 낡은 권총을 쥐며 눈을 감았다.
“고금지서에 갇힌 이들을 구출한다. 증거를 확보한다. 실패하면… 전부 불태운다.”
김철우는 군용 소총의 탄창을 확인하며 속삭였다.
“이건 복수다. 우리 가족, 우리 동네 사람들… 그들의 피를 갚아야 한다.”
마치 서로의 심장을 짜내듯, 다섯 명의 손이 한곳에 포개졌다.
“돌아올 수 없더라도, 끝까지 함께한다.”
짧고 무거운 맹세가 고요한 새벽을 가르며 번져갔다.

지서 담장 너머에서 바라본 풍경은 지독히도 낯익었다.
고금지서는 그에게 있어 ‘고향을 지배하는 철문’이었고, 오늘은 반드시 무너뜨려야 할 표적이었다.
박준서는 가슴 안쪽에서 피로 적신 천조각을 꺼냈다.
그건 죽어간 동지의 군복에서 뜯어낸 것이었다.
그 순간, 그는 이미 살아 돌아오기를 포기했다.
“돌격.”
짧은 명령과 함께 수류탄이 어둠을 가르며 날아갔다.
곧이어 폭발음이 지서를 흔들었다.

고금지서 주위를 맴돌던 개가 갑자기 짖어댔다. 순찰하던 경찰관이 횃불을 들며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총구가 번쩍였다.
탕!
경찰이 고꾸라지자, 곧이어 연발 사격이 지서를 뒤흔들었다.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고, 경비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허둥댔다.
“습격이다! 전원 무장하라!”
안에서 경비 책임자가 고함쳤지만 이미 늦었다.

박준서 일행은 돌담을 넘어 지서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수류탄이 투척되자, 건물 한쪽 벽이 무너져 내리며 불길이 치솟았다.
“이쪽이다! 유치장 열어!”
김철우가 철창을 걷어차자 안에서 갇혀 있던 청년들이 울부짖었다.
“살려줘! 우린 죄 없어!”
쇠창살을 깨부수는 순간, 또 다른 총탄이 스쳐 지나갔다.
정동식이 어깨를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괜찮다, 계속 가!”
피가 흘러내리는데도 그는 다시 총을 들어 올렸다.

지서 안에 남은 경찰들이 완강히 저항했다.
총성이 좁은 마당에서 메아리쳤고, 하얀 벽에는 피가 튀었다.
박준서는 권총을 들고 지서 안으로 뛰어들었다.
책상 위엔 고문 도구와 피 묻은 서류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게 다 증거다. 불태우기 전에 챙겨라!”
바로 그때, 창문 너머에서 총탄이 박혔다.
김철우가 옆으로 몸을 날려 박준서를 밀어내며 대신 가슴팍에 총알을 맞았다.
“으…흐윽… 끝까지… 하라…”
그의 손이 느리게 풀리며 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교전은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마지막 경찰이 쓰러지자, 고금지서 내부는 불길에 휩싸였다.
굴뚝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새벽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탈주병들과 청년들은 지서 뒤편 숲으로 몸을 숨겼다.
남은 건 잿더미와 시체, 그리고 복수의 흔적이었다.
멀리서 종소리가 울렸다. 마을 사람들의 눈빛엔 공포와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이제 고금도는 피의 섬이 되었다.”
박준서는 불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작가의 말
고금지서 습격은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분노와 절망이 폭발한 선택이었다.
가족을 빼앗기고, 고향을 짓밟힌 이들에게 지서는 단순한 관공서가 아니라 억압과 학살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 날의 불길은 곧 더 큰 비극을 불러왔다.
지서가 불타오른 새벽 이후, 고금도는 군과 경찰, 우익단체의 무자비한 보복 속에 섬 전체가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역사는 늘 한쪽의 시선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그날의 불길 속에서 울부짖은 목소리들은
승자의 기록이 아닌, 패자의 가슴속에 남아야 한다.
그들이 싸운 이유는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단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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