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34

어둠의 발자국

by 강순흠


1949년 겨울, 금당도
바다는 잿빛이었다.
눈발이 바람에 흩날리며 마을의 지붕 위를 덮었다.
군수는 마당에 나와 장작불을 피우며 손을 녹였다.
그 불길 위로, 전날 밤 소희의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그녀가 부르던 노래,
그 조용한 떨림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사람의 마음도 언젠가 다시 피겠지요…”
그 노래는 희망이자 예언이었다.
하지만, 금당도의 바람은 언제나 희망을 먼저 꺼뜨렸다.

이튿날 새벽,
동각 앞을 지나던 박 노인은 문득 뒷골목에 멈춰 섰다.
낡은 벽 너머로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군수와 소희였다.
그는 숨을 죽였지만,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시대엔 본 것 자체가 죄가 되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지서 순경이 마을로 내려왔다.
술기운에 비틀거리던 그는 사람들 앞에서 중얼거렸다.
“빨갱이 새끼가 여자랑 몰래 만난다더라.
그 여자, 광주에서 왔다지?”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언제나 총보다 무서운 무기였다.
그 말은 바람을 타고 번개처럼 번졌다.

밤례는 그날따라 불길했다.
“군수야, 오늘은 나가지 마라. 바람이… 싸하다.”
그러나 군수는 말했다.
“소희가 떠난대요. 내일 배편으로.”
그는 등불 하나를 들고 어둠 속으로 나섰다.
갯바위에 다다르자, 소희가 서 있었다.
머리에 꽂은 동백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오빠, 나… 이젠 여기 있을 수 없어요.
아버지의 이름이 날 죄인으로 만들었어요.”
“나도 같아. 아버지의 이름 때문에 매일이 심문이야.”
그들은 서로의 손을 붙잡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바람이, 파도가, 모든 걸 대신 말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손전등 불빛이 번쩍였다.
짖는 개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거기서! 움직이지 마!”
순경 셋이 그들을 포위했다.
소희는 놀라 뒤로 물러섰고, 군수가 그 앞을 막아섰다.
“이 여자는 죄가 없습니다. 나만 잡아가시오!”
“이런 건방진 새끼 봐라.
네놈이 바로 그 두석의 자식이지?”
퍽! 퍽!
몽둥이가 어둠 속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그는 쓰러지며 마지막으로 소희의 얼굴을 보았다.
눈물에 젖은 동백꽃이 눈앞에서 떨어졌다.

지서 안은 차갑고 축축했다.
군수는 의자에 묶인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이미 피멍이 퍼져 있었다.
“자백해.
광주에서 내려온 그 계집이랑 뭘 꾸민 거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턱!
권총 개머리판이 뺨을 후려쳤다.
피가 튀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말에 형사가 웃었다.
“사람? 이 나라에 그런 건 없어, 이 빨갱이 새끼야.”

그날 밤, 지서 뒤편의 눈밭 위에
붉은 동백 한 송이가 떨어져 있었다.
그 꽃잎엔 아직도 미세한 피가 묻어 있었다.
소희는 멀리 언덕 위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동백아, 봄이 오면 다시 피어라.
우리가 피지 못한 그 봄 대신에…”


#작가의 말
사랑은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공포의 시대는 사랑조차 죄로 만들었다.
군수와 소희의 만남은 이념의 벽을 넘은 인간의 본능이었지만,
그 순수함조차 법의 이름 아래 짓밟혔다.
떨어진 동백은 단지 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으로 남으려 한 두 젊은 영혼의 마지막 숨결이었다.
역사는 늘 그들의 이름을 지워왔지만,
그들이 흘린 피와 사랑은
이 땅의 또 다른 봄을 예비하는 씨앗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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