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35

국가의 입속으로

by 강순흠


지서에서 풀려난 지 사흘째. 몸은 멀쩡했지만 마음은 부서져 있었다.
밤마다 귀가 울렸다. 그들이 묻던 질문, 군화가 갈비를 밟던 소리, 그리고 “네놈 아비가 남긴 피가 아직도 흐른다.”
그 말이 뇌리에 남아 떠나지 않았다.
소희가 똥뫼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해처럼 환했지만, 그 안에는 말 못할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괜찮아졌어요?”
군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이젠, 더 이상 그런 데 가지 마요. 지서에도, 아무 데도요.”
그녀의 목소리는 애원처럼 떨렸다.


“소희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이 세상은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아. 그저 누가 먼저 짖느냐로 죄가 정해져. 나도, 언젠간…”
그녀는 내 입을 막았다.
“그런 말 하지 마요. 우리… 그냥 사람으로 살아요. 짐승이 아니라.”
군수는 조용히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그녀의 미소가 슬펐다.
군수는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댈 기다리다… 잎새에 적힌 이름을 불러봅니다…”
소희가 군수를 따라 불렀다.
둘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산자락에 흩어졌다.
짧은 시간, 세상은 다시 사람의 세상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빗방울인 줄 알았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그것은 분명한 두드림이었다.
문을 열기도 전에 들이닥친 두 사람의 그림자.
가죽 장화가 토방을 쾅쾅 울렸다.
“강군수, 조용히 따라와.”
그 말은 명령이 아니라, 이미 판결이었다.
군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 이끌려 지서 마당에 도착했을 때,
비는 멎어 있었고 달빛이 대문을 덮고 있었다.
지서 현관에 걸린 깃발에는 굵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국가보안법 시행령 제1호 ― 반국가행위자는 엄벌에 처한다.’

그 순간, 군수는 깨달았다.
국가는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이었다.
그들은 신문을 시작했다.
“강두석 아들 강군수 맞나?”
“예.”
“그럼 됐네. 그 피는 못 속여.”
쇠사슬에 묶인 내 손목 위로 피가 번졌다.
질문은 없었다. 명분도 없었다.
단지 ‘국가’라는 이름이 내 고통의 이유였다.
“이제 말해라. 네가 산에 연락한 사람, 빨치산 잔당의 위치.”
“아닙니다. 저는…”
“입 닥쳐!”
방 안이 군홧발로 요동쳤다.
그들은 내 얼굴을, 가슴을, 배를 차올렸다.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의 눈이었다.
그 눈에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어쩌면, 그들도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아버지였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잔혹해졌을까.
국가라는 이름이, 그들을 이렇게 만든 걸까.
밤이 깊어갈수록 내 의식은 희미해졌다.
어둠 속에서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군수야, 이 세상은 사람의 말로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도 사람의 말이 끝나면 세상은 짐승이 된다.”
그 목소리에 눈물이 터졌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노래가 들려왔다.
소희의 목소리였다.
“동백꽃 피던 날, 그대의 손길이
차가운 바람에도 내 마음을 데웠네…”
군수는 입술을 달싹이며 따라 불렀다.
“그래, 소희야… 아직 나는 짐승이 되지 않았어.”
그 말과 함께,
그들이 내 몸을 다시 밟아 눌렀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나는 이상하게 평온했다.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아버지가 왜 끝까지 눈을 감지 못했는지를.
그 눈은,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의지였음을.

#작가의 말
국가보안법 아래,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국가보안법의 칼날은 단지 ‘사상’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던 모든 ‘양심’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사상’이라는 이름 아래 어떻게 짓밟혔는지를 보여줍니다.
국가가 공포의 주체가 되었을 때,
그 폭력은 단순한 정치적 탄압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말살하는 행위로 이어졌습니다.
군수의 신문 장면은 실재했던 수많은 고문실의 풍경입니다.
그 속에서 그는 여전히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노래를 기억합니다.
그 노래가, 그리고 사랑이,
이 땅의 인간성을 지켜낸 마지막 불씨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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