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36

붉은 명단

by 강순흠


1949년 여름, 금당도 앞바다의 물빛은 유난히도 탁했다.
포구로 밀려드는 바람 속엔 섞인 냄새가 있었다. 썩은 미역 냄새, 갯벌의 비린내, 그리고 불안의 냄새.
군수는 면사무소 앞에 걸린 현수막을 바라봤다.
“국민보도연맹 가입 권장 – 새 조국 건설의 일꾼이 됩시다!”
보도연맹.
‘전향자를 교화해 국가로 이끈다’는 이름이었다.
글자는 선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빛은 흐렸다.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이제 아무도 몰랐다.

군수는 그날도 지서에 불려 갔다.
형광등 불빛 아래, 경찰 간부가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엔 새로 인쇄된 서류 한 장.
‘국민보도연맹 가입서.’
“자, 서명해.
너 아버지가 뭐 했는진 우리도 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어.
이제는 빨갱이냐, 국민이냐 둘 중 하나야.”
군수는 손끝이 떨렸다.
아버지 강두석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산자락에서 쓰러진 채 끝내 감기지 않던 눈.
그 눈 속엔 ‘타협 없는 믿음’이 서려 있었다.
“싫습니다.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다리가 걷어차였다.
철제 의자가 쓰러지고, 군홧발이 그의 갈비를 짓눌렀다.
피가 입 안에서 퍼졌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아비가 그랬듯, 너도 끝까지 미친놈이군.”
형사는 피 묻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좋다.
이름 안 올리면, 명단 밖 사람으로 남는 거야.
그게 무슨 뜻인진 알겠지?”
군수는 대답 대신 피를 삼켰다.

군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 강두석은 이미 수리넘의 겨울밤에 끌려가 총살되었다는 걸.
그런데 이제,
아버지를 죽인 그 나라가 아들에게는 “새 출발의 기회”를 내민단다.
그 이름이 바로 보도연맹(輔導聯盟).

“강군수, 자네도 이름을 올리는 게 좋을 거야.”
경찰이 낮게 속삭였다.
“안 하면 의심받아. 요즘은 가입이 애국이야.”
그 말투는 설득이라기보다 협박이었다.

군수는 종이를 내려다봤다.
‘전향인 명부’라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줄엔 벌써 몇 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중엔 예전에 아버지 야학에 다니던 서만수의 이름도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서만수를 만났다.
“만수 형님도 보도연맹에 들어갔습니까?”
“응. 안 들어가면 잡혀간대.”
만수는 씁쓸히 웃었다.
“이젠 살기 위해서라도 가입해야지. 사회주의 사상 버리고 새 나라의 국민이 되라잖아.”

며칠 뒤, 군수는 ‘갱생교육’이라 불리는 연맹 강좌에 참석했다.
교육관에는 경찰, 청년단, 그리고 군인들이 번갈아가며 강단에 섰다.
“우리의 원수는 북괴다!”
“불순분자는 사회와 국가의 썩은 가지다!”
“보도연맹은 전향자의 모범조직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소리쳤다.
군수는 그 말들을 들으며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눈보라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사람은 배워야 한다’고 말하던 그 음성.
그게 정말 나라를 해친 죄였던가.

그날 밤, 군수는 방구석에서 어머니의 낡은 사진첩을 펼쳤다.
아버지가 수리넘에 끌려가기 전,
아버지와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이었다.
그 옆에, 밤례가 손수 쓴 글귀가 있었다.
“진실은 언젠가 빛을 본다. 사람의 이름은 흙에 묻혀도 뜻은 남는다.”
군수는 그 글을 한참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제가 다시 배우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요.”

며칠 뒤, 경찰이 마을 곳곳을 돌았다.
“보도연맹 미가입자 명단 확인 나왔습니다!”
그들의 손엔 붉은 도장이 찍힌 종이가 있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명단 위에는 이름이 줄지어 있었다.
그중 맨 위에
강군수
군수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 속엔 두려움보다 오히려 결의가 있었다.
아버지의 피가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네 이름을 지워도, 진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아버지…
당신은 왜 그토록 진실을 말하려 했습니까.
진실이 이렇게 아픈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달빛 아래, 그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시대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작가의 말
1949년, ‘국민보도연맹’은 국가가 국민의 양심을 통제하던 장치였다.
서명은 생존의 조건이 되었고,
거부는 반역의 표식이 되었다.
그 안에서 인간은 신념과 두려움 사이에서 갈라졌다.
군수는 바로 그 경계 위에 서 있는 한 인간의 초상이다.
그는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또한 ‘살아남아야만 하는 시대의 아들’이기도 했다.
진실을 말하면 죽고,
거짓을 택하면 자신이 무너지는 시대
그 속에서 인간은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
그 물음이 바로,
이 시대의 가장 잔인한 고백이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 사상 전향자 교화조직’이라는 명분으로 창설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찰과 관공서의 강압에 의해 무고한 민간인 수십만 명이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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