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37

두 개의 38선

by 강순흠


1950년 봄, 금당도의 바다는 유난히도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평화가 아니라, 폭풍 전의 침묵이었다.
마을을 덮은 안개는 날마다 짙어만 갔다.
포구로 들려오는 바람에는 ‘북에서 전쟁 준비 중’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섞여 있었고,
면사무소 앞 확성기에서는 매일같이 라디오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국가의 적, 공산분자를 색출하라.
전향자는 보도연맹에 등록하고 충성을 다하라.”

말끝마다 ‘충성’이라는 단어가 메아리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의 뜻을 몰랐다.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누가 듣고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군수는 그날도 들판을 걸었다.
논둑 위에 핀 냉이꽃이 바람에 흔들렸고, 그 아래로 짙은 흙냄새가 배어났다.
멀리서 순경 박형진이 보도연맹원 서류를 들고 집집마다 들이닥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사람들을 “국민”과 “불순분자”로 갈라놓고 있었다.
군수는 중얼거렸다.
“사람이 사람을 분류하는 세상이라… 이게 나라일까.”

밤례는 마루 끝에 앉아 손에 기도주머니를 쥐고 있었다.
“군수야, 제발 나서지 마라. 세상이 지금 흉흉하다.
입 한번 잘못 놀리면 잡혀간다. 네 아버지처럼…”
그 말 끝에, 밤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군수는 어머니의 손을 덮으며 말했다.
“이젠 말도 죄가 되는 세상이네요. 하지만, 어머니.
말을 삼키다 보면, 결국 우리도 짐승이 돼요.”
밤례의 눈시울이 떨렸다.
그녀는 더 이상 아들을 말릴 힘이 없었다.

며칠 뒤, 군수는 들판에서 서만수를 만났다.
그는 아버지 두석의 제자였다.
한때는 ‘사람답게 살자’며 밤새 글을 배우던 청년이었지만,
지금은 어딘가 공허한 눈빛이었다.
“군수야… 너도 조심해야 한다.
요즘은 누가 누구를 신고하는지도 몰라.
지서에선, 전향 안 하면 의심하고… 전향해도 또 의심한다.”
그의 목소리는 모래처럼 갈라져 있었다.
군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형님, 우리 이 섬에서 어디로 도망가겠어요.
이 바다를 건너면 또 다른 지서가 있고, 또 다른 명단이 있겠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짙은 안개 너머, 뭍으로 가는 뱃길은 막혀 있었다.
섬은 육지보다 더 작고, 더 좁은 감옥이었다.

그날 밤, 군수는 혼자 바닷가에 섰다.
달빛이 잔물결 위를 흘렀고, 멀리서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에 조그만 돌멩이를 쥐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사람은 돌처럼 살아야 한다. 흔들려도 깨어지지 말거라.”
하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 돌처럼 산다는 건 얼마나 외로운 일입니까.
사람이 흙이 되기 전까지, 이렇게 버텨야 하는 겁니까.”
바람이 불었다.
멀리 지서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터졌다.
누군가 또 잡혀간 것이다.
군수는 눈을 감았다.
그의 마음속엔 두 개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하나는 한반도를 갈라놓은 38선,
그리고 또 하나는 사람의 가슴에 그어진, 보이지 않는 선이었다.
“이 선이 지워지지 않는 한,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작가의 말
전쟁은 총소리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인간의 마음속에 ‘선’을 긋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선은 이념의 이름으로, 신념의 이름으로, 심지어 생존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사람을 갈라놓고, 마을을 갈라놓고, 한 가족의 심장까지 찢어놓았다.
두 개의 38선은 그 선의 비극을 바라보는 한 청년의 기록이다.
그의 침묵과 분노, 그리고 아직 꺼지지 않은 희망은
곧 다가올 피의 시대를 예고하는 불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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