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38

서울이 무너진 날

by 강순흠


1950년 6월 25일, 새벽 바다는 평소처럼 잔잔했다.
갯바람에 밀려온 짠내 속에 파도는 단조롭게 숨을 쉬었다.
그러나 며칠 후, 서울이 무너졌다.
그 사실을 금당도는 나흘 뒤에야 들었다.
면사무소 마당에 세워진 확성기가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전시체제에 돌입한다!”

굵은 목소리가 안개를 뚫고 퍼졌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서울이 무너졌다’는 말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의 나쁜 농담 같았다.

군수는 그날 아침, 선창가로 내려갔다.
물건을 싣고 떠나던 배가 갑자기 되돌아왔다.
선장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육지가 난리라요.
군인들이 퇴각한다 카고, 인민군이 내려온다 카던디…
목포에도 포탄이 떨어졌다 하오!”
순간, 포구가 술렁였다.
노인들은 손에 쥔 짚신을 떨어뜨렸고,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금당도는 섬이었다.
육지가 불타면, 그들은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며칠 뒤, 금당도에는 이상한 바람이 불었다.
육지에서 피란선을 타고 건너온 이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그들의 눈빛엔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인민군이 서울로 들어갔소.
관공서는 불타고, 경찰은 도망가고,
보도연맹원들은… 어딘가로 끌려갔다 하오.”
그 말을 들은 순간,
군수의 가슴에 식은 돌덩이가 굴러 내렸다.
보도연맹.
그 이름은 이미 섬사람들 사이에서도 무서운 낙인이었다.
그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면,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지서의 순경 박형진이 섬을 돌며 외쳤다.
“보도연맹원은 모두 내일까지 신고하시오!
신고하지 않으면 간첩으로 간주하겠소!”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서로의 눈을 피했다.
밤마다 창문 틈으로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렸다.
“저 집은 예전에 좌익이었대.”
“아니래, 그 아들은 공무원이라더라.”
“그래도 누가 신고했다던데…”
섬은 점점 조용해졌지만, 그 침묵은 무겁고, 축축했다.
누구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고,
누구도 진실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군수는 불 꺼진 면사무소 마당을 지나
아버지 두석이 가꾸던 옛 봉강정터에 앉았다.
달빛에 잡초들이 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땅을 어루만졌다.
“아버지, 이 섬이 또다시 미쳐가고 있습니다.
이름이 죄가 되고, 말이 덫이 되는 세상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의 손끝이 떨렸다.
마을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모두 자신을 향한 소리처럼 들렸다.
새벽녘, 파도 소리가 섬을 깨웠다.
지서 앞에는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군수! 강군수 나와요!”
그 목소리는 매서웠다.
군수는 어머니 밤례의 방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녀는 잠든 듯 보였지만, 숨소리가 잦았다.
군수는 조용히 방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혹시 제가 오늘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두려워 마십시오.
이 바다는, 아직 제 이름을 기억할 겁니다.”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일어섰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안갯속으로, 군수의 뒷모습이 천천히 사라졌다.


#작가의 말
전쟁은 총과 포로만 싸우지 않았다.
그보다 더 잔혹한 것은 ‘불신’이었다.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모르는 섬의 사람들.
그 속에서 이름 하나로, 신념 하나로, 인간이 갈라지고 죽어갔다.
서울이 무너진 날은
그 불신의 시대에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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