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흔들리는 깃발
청산도 앞바다는 잔잔했다. 그러나 잔잔함은 언제나 폭풍을 예고하는 법이었다.
며칠 전까지 이 섬은 인민군의 군화 소리에 뒤흔들렸다.
그 이전에는 국군의 고함이 메아리쳤고, 그 사이에는 경찰의 급박한 퇴각이 있었다.
섬사람들은 더 이상 누가 누구인지, 누가 다시 돌아올지, 누가 마지막으로 총을 쏠지 알 수 없었다.
그날 아침, 이장 강영석의 집에 바닷길을 건너온 전갈이 도착했다.
“인민군이 곧 다시 금당도를 점령한다. 환영대회를 준비하라.”
전령은 덧붙였다.
“이번엔 제대로 하라. 섬 전체가 나서서.”
문수는 무릎 위에서 편지를 떨어뜨렸다.
바람에 펄럭이는 종이처럼, 그의 가슴도 흔들렸다.
며칠 전 국군이 인민군을 몰아내고 섬을 ‘수복’했을 때, 주민들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수복된 뒤, 경찰은 부역 혐의자를 색출한다며 마구 잡아가고, 마구 때렸다.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도 있었다.
이제
그 인민군이 다시 들어온다?
영석이는 풀썩 주저앉았다.
“이제… 또?
우린 또 누구 편을 들어야 한단 말이냐…”
영석이는 종종걸음으로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해질 무렵의 햇살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겼다.
회관 안에는 이미 몇몇 어른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눈빛이었다.
영석이가 헛기침을 하자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전보가 왔습니다. 인민군이 곧 다시 들어온답니다. 우리 보고… 환영대회를 준비하랍니다.”
순간, 방 안은 숨조차 멎은 듯 조용해졌다.
이윽고 한숨이 터졌다.
“또 환영을 하라고?
지난번엔 국군이 들어와서 부역자라고 잡아갔는데 이번엔 또 인민군이 들어온다고?”
어떤 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리가 뭐라고… 자꾸 우리 보고 살자고 하면 저리 가라, 말자고 하면 이리 와라, 그러는가?”
“안 하면? 안 하면 우리 살아남을 수 있겠소?”
말 끝에 흐르는 떨림은 회관 천장에 매달린 등잔불처럼 흔들렸다.
섬사람들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보았다.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협력했다는 이유로 경찰이 맞아 죽은 모습,
국군이 들어온 뒤 빨갱이라며 끌려가던 이웃의 모습,
그리고 다시 인민군이 돌아온다는 소문.
섬에선 국가의 얼굴이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죽는 얼굴은 늘 섬사람들이었다.
영석이는 벽을 짚으며 말했다.
“환영대회… 해야 합니다.
이게 우리가 살 길입니다.”
누군가 외쳤다.
“그럼 지난번에 국군이 수복했다가 다시 인민군이 들어오면, 그때 또 우리가 죄인이 되면 어쩌려고요?”
영석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리에 맞는 말이지만, 이 섬에서 ‘도리’란 주인 없는 배처럼 흔들릴 뿐이었다.
그날 저녁, 마을 전체에 소문이 퍼졌다.
“부두에서 인민군 환영대회를 한다더라.”
“애들도 모두 나가야 한댄다.”
“부역자 색출하러 다시 온 거 아님까?”
“그래도 안 나오면 죽는다는데 어떡혀.”
집집마다 밥상이 식어갔다.
숟가락을 든 손이 떨렸고, 누구도 먼저 말하지 못했다.
두 아이의 아버지 전석찬은 마루에 앉아 말했다.
“이번에도 시킨 대로 해야 살아.
그게 진실이다.
어느 쪽이 들어오든 우리 같은 섬사람은 수틀리면 그냥 죽는 거여.”
아내는 아이 둘을 끌어안았다.
“아그들이 무슨 죄라고… 또 나가서 군화 신고 있는 사람들한테 웃어야 한당가…”
불빛 아래에서 그녀의 눈가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흔들렸다.
그날 밤, 부두에서는 환영대회 준비가 시작되었다.
대나무에 붉은 천을 묶고, 깃발을 나부끼게 세웠다.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군대를 ‘환영’ 하기 위해.
아이들은 천을 들고 뛰어다니면서도 이유를 몰랐다.
어른들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서로 숨겼다.
어느 노인은 깃발을 세우다 말고 주저앉았다.
“나라가 또 바뀌는 것이여?
아니, 우리가 바뀌어야 사는 것이여…
나도 모르겄다… 도대체…”
바람이 불며 깃발이 크게 흔들렸다.
흔들린 것은 깃발뿐이 아니었다.
섬 전체가, 섬 사람들의 심장마저 떨렸다.
드디어, 누군가가 외쳤다.
“멀리서 배 온다!”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짙은 안갯속에서 투박하고 검은 윤곽이 바다 위로 떠올랐다.
진짜 인민군일까?
아니면…?
이 순간을 기다리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손을 모았다.
기도하는 이도 있었고, 이를 악문 이도 있었다.
문수는 떨리는 목으로 외쳤다.
“다들 웃으시오! 환영 문구 들고 앞줄로!
살아야 한다고! 살아야…!”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살기 위해.
누구의 편도 아닌 채,
오늘도 나라의 얼굴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리고 마침내
그 배는 청산도 선착장에 닿았다.
영석이는 심장이 멎을 듯했다.
내려오는 발걸음은… 인민군인가, 다른 누군가인가?
오늘, 이 섬은 또 누구의 피를 마셔야 하는가?
섬사람들의 떨리는 숨결 속에서, 배의 사다리가 삐걱이며 내려왔다.
어둠 속에서 군복의 윤곽이 드러났다.
섬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작가의 말
전쟁은 국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땅에 사는 이들의 일상을 가장 먼저 갈아 삼킵니다.
여기 등장하는 경찰부대 역시 그러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급히 조직된 이들은 훈련도 장비도, 전투 경험도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후퇴하는 민간인들의 마지막 방파제가 되기 위해 밤을 새우고, 두려움을 삼키며, 포연 속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냉혹했습니다.
잘 준비되지 못한 부대는 전면전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버거웠고, 폭격과 기습에 쓸려 나가듯 붕괴되었습니다.
총성이 멎은 자리에는 쓰러진 동료의 손, 흩어진 탄약통, 그리고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간절한 숨이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며 다시 깨닫습니다.
전쟁은 결코 영웅담만으로 기록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지키려 했고, 누군가는 도망쳐야 했으며, 누군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틈에서 흔들리고, 무너지고, 쓰러졌던 이름 없는 존재들
그들의 발걸음과 심장의 떨림, 그 미세한 인간적 진실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전쟁의 시작과, 준비되지 않은 자들이 맞닥뜨린 현실’
당연하게 여겨졌던 하루하루가 무너지는 순간, 사람은 어떻게 변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