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깃발 아래의 낯선 발걸음
부두의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
사람들은 가슴을 움켜쥔 채 배를 바라보았다.
안갯속에서 내려오는 발걸음은 느렸고, 더듬거리며 섬을 밟았다.
영석 이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제발… 제발 이번만은 조용히 지나가다오…’
그러나 희미한 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섬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그러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짙은 회색 군복이었다.
“저… 저 옷은… 인민군이 아닌디?”
“국군도 아니고…”
“경찰인가? 근데… 왜 인민군 옷을…”
사람들의 속삭임이 바람처럼 흩어졌다.
군복의 칼 주름, 정돈된 걸음.
인민군 특유의 투박함이나 어설픔이 아니었다.
이들은 너무 침착했고, 너무 훈련되어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너무 조용했다.
가장 먼저 사다리를 내려온 사내가 입을 열었다.
“청산도 인민 여러분.”
목소리는 낮았지만, 피할 수 없는 명령이 실려 있었다.
“우리를 환영하러 나온 마음, 잘 알겠소.”
그 말에 섬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정적’이 스쳤다.
그들의 말투, 호흡, 눈빛…
이것은 인민군이 아니었다.
영석이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우린… 낚였구나.’
그러나 이미 늦었다.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말을 이었다.
“앞장서시오.
섬에 인민군 협력자가 누구인지
이제부터 밝히면 되오.”
회관 앞에 모인 주민들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협력자라뇨… 우린 시킨 대로 환영하라 해서…”
“가만있어! 함부로 입 열지 마라!”
누군가 절규했다.
그러나 군복을 입은 자들은 주민들의 변명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정해진 절차도, 설명도 없었다.
한 사내가 걸어 나와 주민들 사이를 훑었다.
그의 눈길이 피에 굶주린 매와 같았다.
“저기… 저 남자.
인민군 들어왔을 때 환호했다지?”
누군가의 몸이 움찔했다.
주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희생양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나… 나는 그저… 나가 아니면 우리 온 식구가 죽을까 싶어서…”
그 남자는 무릎이 풀려 땅에 쓰러졌다.
그러나 군복들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연행해라.”
짧은 명령과 함께 두 사람이 튀어나와 남자의 팔을 비틀었다.
여인들 몇 명이 울부짖으며 뒤따랐다.
이때였다.
강영석 이장이 겁에 질린 눈으로 한 장면을 보았다.
군복 속에서 살짝 드러난 경찰 마크.
문수는 숨이 끊어질 듯 멎었다.
‘경찰… 경찰이다.
국군 수복이 된 사이, 복수하러 돌아온…’
그는 양손을 떨며 입을 가렸다.
이 사실을 말한다면?
그 자리에서 즉시 죽을지도 몰랐다.
군복들은 주민들을 부두에 세워놓고 한 줄로 세웠다.
“ 청산도 인민군 환영대회
참여자 전원 확인한다.”
이 말이 떨어지자 주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떨었다.
이제는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누가 ‘빨갱이’로 몰릴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바람이 불자 붉은 깃발이 크게 휘날렸다.
붉은색은 핏빛처럼 흔들렸다.
어떤 노파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환영이여?
아니면… 죽음의 대기열이여…”
영석이는 하늘을 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무엇인가…
또 누굴 잃게 될까…’
그러나 그 순간 또 한 번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제
각 마을별로 인민군 협력자를 지목하시오.”
이 말과 함께 부두는 지옥이 되었다.
“우리 마을엔 없습니다!”
“모른다고요!”
“우리가 왜 서로를 지목해야 합니까!”
절규가 파도처럼 번졌다.
군복들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판단하겠다.”
바다에서 밀려온 비릿한 바람이 부두 위를 훑고 지나갔다.
오늘, 이 섬은 또 한 번 피의 역사를 쓰려하고 있었다.
#작가의 말
청산도 주민들이 겪은
‘선택할 수 없는 선택’
전쟁은 군인들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총을 들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까지 그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폭력’ 자체보다,
그 폭력을 둘러싼 심리적 압박입니다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살기 위해 협력해야 했던 섬사람들
국군이 수복하자 부역자로 몰려 끌려갔던 이웃들
그리고 이제, 다시 원인도 모르는 ‘환영대회’를 강요받는 순간
이 모든 과정은 누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닙니다.
섬사람들에게는 단 하나의 기준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살아남을 수 있는가.”
그러나 생존을 위한 선택이 오히려 또 다른 위험을 부르고,
그 위험이 다시 누군가의 죽음으로 귀결됩니다.
전쟁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사람을 죽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총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을 부수어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