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개
조선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총보다 먼저였다.
말씀은 조용히, 그러나 깊게 뿌리내렸다.
서당 옆에 교회가 세워졌고,
장터 옆에 예배당이 들어섰다.
백성들은 글을 배웠고, 성경을 읽었으며,
스스로 장로를 세우고 교회를 다스렸다.
이계실,
총회가 열리기 전날 밤,
이계실 목사는 잠들지 못했다.
등잔불 아래
성경은 이미 여러 번 펼쳤다 접혔다.
페이지 모서리는 닳았고
시편은 눌려 있었다.
“우리가 사람의 말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말을 따를 것인가…”
사도행전의 문장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웠다.
밖에서는 바람이 불었고
멀리서 군화 소리가 났다.
총회장 주변에는
이미 일본 헌병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일 결정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목숨의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탁자를 쥔 손이 떨렸다.
‘내가 거부하면
이 교회는 사라질 것이다.
성도들은 흩어질 것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쫓겨날 것이다.’
머릿속에는
덕천교회 예배당이 떠올랐다.
겨울마다 언 손으로 찬송 부르던 노인들,
말씀을 받아 적던 아이들,
장날에도 예배를 빠지지 않던 성도들.
‘내가 고집을 부리면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
그는 목사였다.
양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쳤다.
‘내가 무릎을 꿇으면
이 교회는 무엇이 되나.’
성경을 들고
신사 앞에 서는 교회.
하나님을 부르며
천황에게 절하는 예배.
그는 상상했다.
자신이 신사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그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 묻는 것 같았다.
“목사님,
우리는 누구에게 예배합니까?”
그는 성경을 덮었다.
그리고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신사 앞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
제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아닌 것에
절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이
책장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사로 살기로 했다.
살아남는 목사가 아니라
당당하고 증거하는 목사로.
총회의 날
1938년 9월 9일.
총회장은 숨을 삼킨 듯 조용했다.
의장은 서류를 들고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고
이에 협력할 것을 결의한다.”
아무도 박수는 없었다.
그러나 고개는 숙여졌다.
그때
이계실이 일어섰다.
그의 다리는 떨렸지만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나는 이 결의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숨을 멈췄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하지만,
절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총회는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고
따르기로 가결했다.
그날, 교회는 편한 길을 택했다.
그러나 믿음은 그 길을 따르지 않았다.
이계실 목사와 다섯 교회는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덕천교회
동상리교회
기곡교회
장흥교회
상수리교회
이 다섯 교회는
“하나님 외에 누구에게도 절할 수 없다”
누군가 말했다.
“목사님,
교회를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대답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그날
그는 소수가 되었고
외로운 사람이 되었고
위험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노회에서 탈퇴했다.
그는 살기 위해 침묵하지 않았고
죽지 않기 위해 굴복하지 않았다.
그의 신앙은
큰 목소리가 아니라
작은 고집이었다.
무릎 꿇지 않는 고집.
하나님만 향한 고집.
#작가의 말
이계실 목사의 선택은
영웅적 결단이라기보다
목사로서 마지막 정직이었다.
그는 역사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양심을 배반하지 않으려 했다.
신앙의 위기는
언제나
거대한 악이 아니라
작은 타협으로 시작된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다들 하잖아.”
“살아야지.”
그 말 앞에서
한 사람이
끝까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서 있음이
교단이 되었고
전통이 되었고
오늘의 신앙이 되었다.
나는 묻고 싶다.
우리는 무엇 앞에서 무릎을 꿇는가
무엇 앞에서는 끝까지 서 있는가
신앙은
예배당 안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목적과 무릎의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