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40

검은 그림자 속의 불꽃

by 강순흠


전황은 점차 기울고 있었다. 일본은 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태평양 전선에서 잇따라 패배했고, 동남아의 자원선도 하나둘 끊기기 시작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무너진 해상 주도권은 다시 회복되지 않았고, 사이판이 함락되자 일본 본토가 사정권에 들어갔다.
“이제 저들이 바다를 건너오면, 모든 게 끝납니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김구, 조소앙, 지청천,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회의실에 모였다. 지도의 조선 본토 위에는 검은 선과 점들이 빼곡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일본군 주둔지, 경찰서, 주요 철도, 그리고 예상되는 연합군의 상륙 경로였다.
“OSS와의 공동작전안을 검토해야 할 때입니다.”
조소앙이 말했다. OSS, 미군 전략사무국은 조선의 항일 세력과 손을 잡고 본토 침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인 광복군 일부를 특수교육 시켜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려 했다. 해방을 향한 실질적인 군사행동이었다.
김구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해방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해방을 쟁취해야 합니다. 조선의 독립은 연합국이 던져주는 보상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피로 써야 하는 역사입니다.”
그의 눈빛은 단호했고, 이마에는 진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30년을 넘는 망명과 투쟁. 조국은 여전히 그림자 속에 있었지만,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잿빛 하늘 아래 평양 외곽의 어느 허름한 민가. 그곳 지하의 좁은 방 안에는 열 명 남짓의 인물이 모여 있었다. 한 남자가 창틀 틈으로 거리를 훔쳐보았다. 두 눈은 피로에 젖었지만, 매서운 결기가 살아 있었다. 그가 바로 강두석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유학을 다녀오고, 야학과 계몽운동을 하며, 고문과 수감도 겪었던 남자. 그는 김상진이 체포되는 장면을 숨어서 목격했다. 그날 이후, 두석은 무너진 마음을 가다듬고 무장투쟁 계열의 생존자들, 종교·노동계 조직, 철도 노동조합 등과 비밀리에 접촉했다. 조선 내부의 '조용한 불꽃'을 살리는 일이 그의 사명이 되었다.

언젠가 금당도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새벽 책을 읽던 청년은, 이제 조국의 대지를 향해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 그곳은 위험하다고 들었습니다.

건강과 안전을 지키는 것도 조국을 위한 길입니다.”
밤례가 적은 편지를 쥔 채, 두석은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도, 내가 나가야 할 길에 내가 가야 합니다. 우리 땅을 밟는 첫날, 난 죄 없는 자식이 되기보다, 떳떳한 죄인이 되겠소.”
그는 웃었지만, 눈가에 묻은 피로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충칭 임시정부와 밀서를 주고받았다. 손에 쥐어진 암호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때가 오면, 귀하의 손으로 본토를 열 것입니다.”

산골 마을의 폐교에서 열린 모임에서, 두석은 조용히 선언했다.
“우리가 준비한 이 지하조직은 광복군의 진공작전과 함께 일거에 봉기해야 합니다. 해방은 받는 것이 아니라, 탈환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상보다 빠른 해방은 그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그리고 카이로 선언의 실현. 연합군의 승전 소식은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광장을 향해 뛰어나갔고, ‘해방’이라는 단어는 마치 축제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두석은 그 환희 속에서 고요한 절망을 느꼈다.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인데... 우리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미군정이 들어왔고, 소련군이 북쪽을 점령했다. 임시정부는 승인받지 못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이어온 비밀 연락망은 갑자기 무의미해진 듯했고, ‘조선의 주도권’은 다른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는 밤례에게 편지를 썼다.
“해방이 왔소. 그러나... 참된 해방은 아직 멀었소. 내가 너무 조심스러웠던 걸까. 아니면, 너무 믿었던 걸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뜨거웠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조선의 자주독립, 그것이 진짜 목적이었다.


#작가의 말
이제 해방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엔 아직 수많은 불확실과 어둠이 깔려 있습니다. 전쟁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인들은 침묵의 땅 위에서 말 없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OSS와의 협력,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 그리고 충칭 임시정부의 분투는 해방의 물꼬를 트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조국을 향한 뜨거운 맹세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해방은 기다린 자에게 기쁨이지만, 싸운 자에게는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강두석은 조선 내부에서의 투쟁과 외부 임시정부와의 연대를 꾀했지만, 세계사의 급류는 그들의 이상을 무력화시켜버렸습니다. 해방의 ‘빛과 그늘’ 사이에서 강두석이 마주하는 역사의 아이러니와 자주독립의 상실감을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