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41

해방의 조국, 불안의 시작

by 강순흠



정오의 정적을 깨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
“징그히와 다마라…”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은 수많은 백성의 귀에 어눌하게 꽂혔다. 그러나 그것은 곧 해방이라는 말로 번졌고, 조선은 35년 만의 사슬을 끊어냈다.

금당도에서 김상진이 체포되던 그날, 숨죽이며 지켜보던 강두석은 그 장면을 가슴 깊이 새겼다.
그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무장투쟁계열의 지하조직과 접선하며, 충칭 임시정부와의 밀서를 주고받는 연락책으로 은밀히 움직여왔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미완으로 자주독립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광복군과 두석의 비밀조직이 조국해방의 깃발을 꽂지 못하고 연합군의 공세에 의한 일본의 패망은 뼈아픈 우리 민족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비극이 되어 버렸다.

완도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유난히 고요했다. 물결 하나 들이치지 않는 잿빛 바다 위로, 평소 같으면 들리지 않았을 듯한 까치 울음이 맑게 퍼졌다.
“일본이… 항복했다는구먼.”
굳은 손으로 신문지를 꼭 쥔 장노인은 말끝을 흐리며 먼 하늘을 보았다.
완도로 돌아온 두석은 어떤 복잡한 감정이 마치 오랜 감옥에서 석방된 죄수가 갑자기 거리에 내던져졌을 때처럼 막막함이었다.
며칠 뒤, 서울에서 전보가 도착했다.
‘건국준비위원회 발족 – 위원장 여운형, 치안 유지 및 식량 분배 주도 예정.’
이름을 본 순간, 두석은 오래전 동경에서 마주쳤던 여운형의 연설을 떠올렸다. “조선의 운명을 조선이 결정해야 합니다!”

여운형은 조선총독부와 협상에서
“총독부가 조건부로 권한을 넘기기로 했다.
완도에서도 건준의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두석은 지도자들과 함께 여운형이 제시한 ‘5개 보장 조항’을 회람했다.
• 모든 정치범을 즉시 석방할 것.
• 당장에 경성 시민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확보해 줄 것.
• 우리 조선이 주체적으로 치안을 맡는다.
• 총독부는 치안 유지와 건설 공사에 간섭하지 않는다.
• 학생들과 청년들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거… 왜 저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겁니까?”
한 청년이 이마를 찌푸렸다.
두석은 침묵했다. 그것은 그 역시 느끼고 있던 불편함이었다.
조선의 해방이 조선의 손으로 오지 않았다는 사실.
해방이 아닌 ‘이양’이 아닐까
며칠 뒤, 두석은 김기홍과 함께 비밀리에 모인 회의에 참석했다.
기억 속의 김상진이 체포되던 날,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두석, 준비하라.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야.”
그리고 그 싸움은, 총이 아니라 말과 펜과 조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조선의 독립은 종이 위의 선언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날, 두석은 처음으로 자신이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곱씹었다.

“우리가 나라를 세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손에 맡겨질 것인지는… 지금 우리가 결정해야 해.”

해는 어느덧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완도의 바닷바람 속에 실린 희망과 불안.
그 둘은 마치 칼날처럼 얇고도 날카로웠다.

#작가의 말
1945년 8월 15일, ‘해방’이라는 두 글자는 분명 기쁨이었으나, 동시에 커다란 물음표이기도 했습니다.
이 땅의 해방은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연합군의 이해관계 속에서 찾아온 ‘조건부 자유’였고, 따라서 당연하게도 우리는 그다음 단계를 주체적으로 준비해야 했습니다.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의 등장, 그리고 총독부와의 협의 속에 담긴 5가지 조건은 그 혼란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민중이 굶주리지 않고, 공백의 시대에 질서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뇌와 타협은 곧 다른 세력의 반감과 오해를 부르기도 했지요.
두석이라는 인물을 통해, 해방을 맞은 조선인의 복잡한 감정을 천천히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어쩌면 해방은 시작이 아니라, 또 다른 ‘투쟁의 서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망각보다 기억이 길기를, 침묵보다 사유가 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