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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개나리 3

금당도에서 피어난 민족의 등불

by 강순흠

"바다의 글꽃"


한일강제병합기, 완도 소안도 민족학교를 배경으로


마을 앞바다에 매운 소금내음이 퍼지던 오후, 의회는 복례의 진통 소리에 손을 부르르 떨었다.
뒤뜰 대나무숲이 샛바람에 쏴르르르 댓잎 잎사귀가 서로를 비비며 복례의 진통소리와 음률을 맞출 때 드디어 아들을 출산했다.
의회는 금줄을 대문에 걸고 모든 부정과 악귀가 틈타지 않기를 빌고 기원했다.
아이울음소리가 섬 전체를 뒤흔들었다. 의회는 붉은 고추와 참숯이 달린 금줄을 바라보며 "하늘이 내린 아이로다" 중얼거렸다.
할아버지는 손주를 안고 마당에 나섰다. "이 아이 이름을 '두석'이라 하세.

"세상을 의롭게 펼쳐갈 아이가 될 걸세"


세이레가 지나자 친족들과 온 동네 사람들까지 축하와 하례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멀리서 오는 친척들과 지인들로 봉동 마을이 북적이고 의회의 마당은 매일같이 떡매치는 소리와 기름진 음식 내음으로 북새통이다.
정실 부인 근임은 호적등본을 꺼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첩의 자식이지만... 대를 이을 혈육이로구나."
"두석이는 집안의 보물이요 반석이 되리라"

할아버지는 신문지 조각을 쥔 채 울음을 터뜨렸다. 「매일신보」 8월 30일 자 헤드라인이 눈을 찔렀다.
'한일합방, 천황 폐하의 은혜로 조선이 새 역사를 맞이하다'
서당 훈장이 문틈으로 내던진 말이 톱밥처럼 박혔다.
"이 아이가 태어나던 해 나라가 망했소."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했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519년 만에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대한제국이 수립된 지 14년 만이다. 대한제국의 국호가 없어지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다.

"나라가 무너져 가는데,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어떨까?"


두석은 여섯 살 되던 해부터 아버지 의회의 등에 업혀 바다를 건넜다. "아들아, 저기 보이는 섬이 소안도다. 거기에 우리 민족의 학교가 있단다" 완도 앞바다의 푸른 물결을 가르며 의회는 조각배를 저었다. 소안도 민족학교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섬에 세워진 비밀 교육장이었다.

매주 주말이면 의회가 배를 타고 왔다. 두석이 뛰어올라 팔을 감싸 안을 때, 그는 아들의 손에 묻은 먹물 자국을 보며 흐뭇해했다.
"오늘은 어떤 글을 배웠나?"
"이순신 장군'이요! 일본 군사들을 다 물리친 분이라며요?"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일본 배를 부쉈어요?"
두석이 물을 때마다 의회는 노를 저으며 배 밑을 스치는 물결을 가리켰다.
"바다가 우리 집이야.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우리가 막아야 해.
의회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를 저었다. 파도가 배를 흔들 때마다 두석의 목소리가 바다 위로 퍼졌다.
"아버지, 저도 커서 글을 가르칠 거예요. 우리말로!"

아들의 손에 묻은 먹물이 아버지 의회에겐 희망이고 답답한 마음에 등불이 되었다
의회의 입가에 알듯 모를듯한 미소가 번지더니 금세 뱃노래 가락이 흘러나왔다
"어기야 디여차 어허야 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아버지, 이건 무슨 책이에요?"
다섯 살 두석이 건넨 「소년」 잡지 표지엔 안창호의 연설문이 실려 있었다. 의회는 배 안쪽 판자 밑에서 철판을 들어냈다.
"이게 진짜 책이란다.
일본 헌병이 왔을 땐 이 철판 위에 고기통을 올려둬."

소안도 민족학교의 교실 뒤편엔 나무상자가 있었다. 학생들은 쌀자루 속에서 「맹자」와 「을지문덕전」을 꺼냈고, 창가에선 항상 파도 소리가 교과서를 메웠다.
"선생님, 왜 우리는 '기미가요'를 안 부르나요?"
"왜 일본 말로 수업 안 해요?"
두석의 물음에 교사는 창문을 가리켰다.
"저 바다 건너 육지에선 우리말을 쓰다가 감옥에 갇혀. 여긴 그들이 못 오는 자유의 섬이고 저항의 공간이야"

소나무 숲 사이로 번개처럼 스치는 횃불 빛.

지푸라기 밑에 감춘 활시위 소리가 바람을 가르더니,

지도 펼치는 소리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었다."
열두 살 된 두석이와 순형이 호기심에 따라가 보니, 김상진이 상급생들을 모아놓고 『대한매일신보』를 읽고 있었다.
"쇠똥구리 같은 일본 놈들, 조선의 토지와 곡식을 다 빼앗아 간다!"
누군가가 두석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꼬맹이는 얼른 들어가!"
김상진이 다가와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 두석아 네가 본 건 조선의 심장이야. 이 섬에서 배운 이들은 모두 조국의 국권을 되찾는 독립군이 된다. 너도 민족의 등불이 되겠니?"

김상진 상급생이 지휘봉 대신 들고 다니던 것은 부러진 노젖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걸로 왜선 333척을 박살 냈다.
우리 손에선 어떤 역사가 써질까?"


의회는 아들을 데리러 다녀오다 파도에 휩쓸렸다. 배가 전복될 위기에서 두석은 아버지의 등을 잡아당겼다.
가을태풍이 섬을 삼키던 날, 의회는 배를 저으며 두석의 몸뚱이를 묶었다. "파도는 우리 편이다. 조선의 바다는 적을 집어삼키는 용이야." 폭풍우 속에서 두석은 아버지의 왼쪽 귀에서 핏물이 섞인 말을 들었다.
아버지! 우리 집에 못 가는 거예요?"
의회는 아들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이 배가 가라앉어도, 네 가슴에 등불은 꺼지지 않을 거야."
의회는 마지막 힘을 다해 노를 저었고
가까스로 육지에 닿은 부자는 기진맥진이 되었다.
"의회의 왼쪽 귀에서 핏물이 파도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나왔다. 두석은 아버지 옆구리에 박힌 조각배 나뭇조각을 뽑으며, 소금기에 절린 상처에 입을 대었다."

그날 밤 두석은 상처 난 손바닥으로 일기장을 적었다.
'1922년 9월 15일, 아버지와 내가 바다에서 죽을 뻔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아 이 책장에 역사를 새긴다.'

"나는 폭풍우 속에 대한의 등대가 될 것이다."


1923년 봄, 두석이와 순형은 조선을 떠나 일본 동경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아버지가 건넨 한 권의 책이 배꼽잡이에 감춰져 있었다. 표지엔 『해가 서쪽에서 뜬다』(1922, 최남선)라고 씌어 있었다.
"네 시대가 왔다. 글빛으로 조선을 밝혀라."
의회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두석은 파도 위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엔 어린 시절의 먹물 자국이 아직도 선명했다.
"두석의 새까만 손금 사이로 스며든 먹색이 파도 위에 비친 달빛과 겹쳤다. 동경행 배 갑판에 선 소년의 그림자는, 소안도에서 글을 배우던 다섯 살 적 모습으로 바닷물 위를 걷고 있었다.

글은 총알보다 세다.
네가 쓴 한 글자가 천 명의 군사보다 위협적이란다."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을 후려쳐라."


#작가의 말
한 개인의 탄생과 삶과 민족의 운명이 교차하는 '어둠 속의 등불'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다.
바다는 저항의 공간이자 희망의 통로였다. 소안도의 파도 소리는 한글 교과서의 활자 소리가 공명했고, 두석의 먹물 자국은 조선의 상처를 적었다. 역사는 패배가 아니라, 글자 하나에 깃든 저항의 의지를 기록한다. 등불은 바다 위를 떠도는 배 안에서도 꺼지지 않는다. 의회와 두석의 운명은 지금도 파도 속에서 저항과 자유의 갈망하며 한 줄을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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