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 관동을 넘어
1923년 봄, 두석과 순형은 배움을 찾아 동경으로 향했다. 식민지의 어둠을 뚫고 빛을 잡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두석과 순형은 신학문인 법학을 배우려 했다. 하숙집 방 한켠에서 쓸쓸히 적응하던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 해 가을, 역사가 잿빛으로 물들 것을.
9월 1일 정오 5분 전.
순형이 도서관 계단을 내려가던 찰나, 땅이 울렸다. 진동은 순식간에 폭풍으로 변했다.
"두석아!"
비명 섞인 외침이 채 터지기도 전에, 도쿄 게이오기주쿠 도서관 석조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두석은 순형을 끌어안고 기둥 뒤로 굴렀다. 먼지와 피맛속, 그들이 본 것은 불길이 삼켜가는 도시였다.
"저기… 저 불이 사람을 집어 삼키고 있어."
순형이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난방 화로가 뒤집히며 일어난 화재는 초가을 건조한 바람을 탔다. 시민들이 우물물을 퍼내려 뛰어다니는 사이, 두 사람은 하숙집으로 달렸다. 길거리엔 이미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지진 3시간 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갑작스런 외침에 두석의 발이 얼었다. 골목 너머에서 일본 청년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저기 조센징이다!"
순형이 두석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도망쳐!"
그들은 쓰레기통 뒤에 숨었다. 가슴을 쥐어짜는 공포 속에서 들은 것은 학살의 현장이었다.
"우린 아무 죄도 없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한국어 울부짖음.
군중의 함성,
몽둥이 찧는 소리.
이윽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두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번졌다.
그날 밤, 그들은 폐허가 된 공장에 숨었다. 바깥에선 자경단의 횃불이 어둠을 가르고 다녔다. 순형이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우리가… 정말 독을 탔을까?"
두석은 분노로 목이 메었다.
"그건 핑계야. 우릴 벌레 취급했던 것뿐이야."
먹을 것도 물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두석은 위험을 무릅쓰고 우물로 갔다. 그곳에선 일본 노파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두석의 한국 억양을 듣자 눈을 부릅뜨다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며 속삭였다.
"도망쳐… 경찰이 너희를 잡으러 다닌다."
찾았다! 여기 조선인 있다!"
횃불을 든 군중이 골목을 에워싼다. 두석이 순형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발밑에서 스치는 것이 눈동자에 선명하게 박혔다.
쓰러진 채 개천에 떠 있는 여자 아이의 흰 저고리.
"뛰어! 숨을 곳이 있어!"
낡은 양철창고 속, 일본인 노동자 가네코가 그들을 감춘다.
"내 아들... 히로시가 조선에서 죽었는데, 너희를 구하는 게 아이의 빚 갚는 거겠지."
창문 틈으로 보이는 하늘은 검은 연기로 짙어졌다.
어느 날, 군인들이 공장을 수색했다. 두석은 간신히 지하 구덩이에 숨었다. 머리 위에서 총성이 울렸다. 중국인 노동자들이 끌려가던 참이었다. 순형이 귀를 틀어막고 몸을 떨었다.
"살아남아야 해. 이 모든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해."
지진 2주 후, 조선인 학살 사실이 신문에 작게 실렸다.
' 진재로 인한 유감스러운 사건'.
두석은 그 기사를 찢어버렸다.
그해 겨울, 두석과 순형은 폐허 속 가설 교실에서 수업을 재개했다. 창가에 눈이 내렸다. 순형이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두석아, 우리가 돌아가면… 여기서 본 걸 반드시 책으로 써야 해."
두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 아직도 비명소리가 맴돌았다.
"죽지 않은 자의 의무야. 기억하는 것, 바로 그거지."
"동경은 죽음의 도시였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인간이 어떻게 야수가 되는지 배웠다.
"이 글을 읽는 이여, 반드시 기억하라.
그러나 결코 똑같이 되지 말라."
두석이 적은 메모 수첩 위에 시린 눈물자국이 뚝뚝 떨어지자 검은 잉크가 종이결을 따라 번졌다
바다 너머로 보이는 관동의 땅은 아직도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듯했다.
일 년이 지나 두 석이 황폐해진 가네코의 양철창고 앞에 선다.
벽에 새겨진 낙서,
<'여기서 23명이 죽었다'>
"우린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된 거로다."
바람에 날리는 재가 그의 모자 위에 앉는다. 먼 곳에서 방재 사이렌이 울려온다.
#작가의 말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모든 영혼들을 기억하며, 역사의 어둠을 증언하려 합니다. 그들의 이름이 지워졌어도, 우리는 끝내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은 일본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자연재해 중 하나입니다. 간토(關東) 지역을 강타한 이 지진은 규모 M7.9로 추정되며, 도쿄, 요코하마, 가나가와 등 주요 도시가 초토화되었습니다. 주요 피해 내용과 여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피해 규모
- 사망·실종자: 약 10만 5,000명 (공식 기록).
- 건물 붕괴: 10만 채 이상.
- 화재 확산: 지진 발생 시간이 정오 직전이어서 난방용 화로가 넘어지며 대규모 화재 발생. 바람을 타고 번져 도쿄 40% 이상이 소실되었습니다.
- 쓰나미: 지진 30분 후, 이바라키현과 시즈오카현에 최대 12m 높이의 쓰나미 발생.
2. 사회적 혼란과 한국인 학살
- 유언비어 확산: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고 방화한다"는 허위 정보가 퍼지며, 일본 군경과 민간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약 6,000명의 한국인과 중국인 등을 학살했습니다. 이는 식민지 차별과 사회적 불안이 결합된 비극이었습니다.
- 정부의 방조: 당국은 유언비어를 제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지역에서는 군부가 학살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3. 재건과 교훈
- 도쿄 재건 계획: 도시 계획가 고토 신페이가 주도하여 광폭 도로, 공원, 방화 건축물 등을 도입해 현대적 도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 방재 문화 정착: 매년 9월 1일은 "방재의 날"로 지정되어 전국적 재난 훈련이 실시됩니다.
4. 역사적 의미
- 식민지 피해자 문제: 한국인 학살 사건은 오랫동안 일본 사회에서 은폐되다가 1970년대 후반에야 본격적으로 조사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도 피해자 유족들은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 재난 인권 교육: 재난 시 약자 보호와 유언비어 경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관동대지진은 자연재해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이라는 이중적 참상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출처: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일본 기상청 기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