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재편
해방된 조선의 거리에, 구겨진 제복들이 다시 걸어 나왔다.
한때 친일경찰로 조선인을 탄압하던 자들이, 이번에는 ‘반공의 깃발'을 들고 돌아왔다.
그 중심에는 순형이 있었다.
그는 이제 전남도 경찰부 정보과장 대우로 승진해 있었다.
정판사 사건 이후, 좌익계열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사찰과 검거 작전이 시작됐고, 미군정은 ‘행정의 안정화’라는 명목 아래 이들을 지원했다.
“이 자들은 모두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순형이 회의석상에서 말하며 내민 보고서에는
두석, 기호, 문진, 하복, 정희…
모두가 한때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이었다.
그를 바라보던 미군 고문관 윌리엄슨 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산주의와의 전쟁은 이제 시작입니다.”
그 말은 축복이었고, 동시에 면죄부였다.
두석은 최근 들어 사방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봉강정은 “사상 오염 우려가 있는 기관”으로 분류되었고, 민중조합은 자진 해산을 강요받았다.
심지어 그의 집까지 도청의 기척이 느껴졌다.
밤마다 그의 창문 밖에서 낮은 기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전, 우편함에 들어온 익명의 경고장.
“강두석, 당신의 신념은 시대와 맞지 않습니다.
더 늦기 전에 그 펜을 놓으시오.”
목포경찰서 뒷마당.
구형 군용 트럭 한 대가 멈췄다.
그 위에서 정희가 눈을 감고 끌려 내려왔다.
그녀는 해방 이후 여성을 위한 노동조합을 조직했고, 혼자 아이를 키우며 마을 소작농을 위한 글을 가르쳤다.
이제 그녀의 죄명은 “좌익선동 및 반국가 활동.”
“이 여자가 두석과 함께 활동한 기록이 있습니다.”
순형은 보고서를 넘기며 말했다.
그 순간, 순형의 눈동자 한켠에서 미세한 흔들림이 지나갔다.
그는 정희의 첫 교사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동경에서 돌아온 두석과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며 웃던 그녀의 얼굴을.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살기 위해선 선을 그어야 한다.”
그 선 너머에 자신이 있는 한, 친구와 동지는 기억에서 지워야 할 존재였다.
며칠 뒤, 두석은 공공연하게 “좌익 동조자”로 낙인찍혔다.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아이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교실은 텅 비었고, 그의 원고는 더는 신문사에 실리지 않았다.
그날 밤, 두석은 기도처럼 글을 썼다.
‘신념은 불에 타는 것이지,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아직 꺾이지 않은 연필 하나였다.
#작가의 말
해방 이후의 조선은,
친일 경찰이 다시 영웅이 되고,
진짜 독립운동가는 감시 대상이 되는 나라가 되어갔습니다.
순형이라는 인물은 살아남기 위해 과거를 봉인한 채,
다른 사람들의 신념 위에 자신의 생존을 쌓았습니다.
그의 마음속 갈등은 그를 인간답게 만들지만,
그가 택한 선택은 역사의 비극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두석은 점점 고립되어갑니다.
그러나, 그 고요한 고립이야말로, 진실의 마지막 불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