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쓴 명령서
1948년 10월 20일.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국가 반역으로 규정했다.
육군총사령부는 즉각 토벌대를 조직했다.
사령관 손원일은 담담히 명령서를 읽었다.
“지체 없이 반란군을 진압하고,
협조한 자는 가차 없이 처단하라.”
그러나 문장의 말끝마다
붉은 피 냄새가 배어 있었다.
군인들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토벌대 소속 이경호 상병은
여수 봉기 진압 명령을 받고
한 줄 일기를 썼다.
“총을 들었으나, 마음은 들지 못했다.”
그는 순천에 들어선 뒤
민간인들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여섯 살짜리 아이가
어머니 옆에서 울고 있었다.
“쟤도 공산당이냐?”
고참이 물었다.
이경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방아쇠는 그의 손가락이 당겼지만,
영혼은 멈춘 채였다.
봉기 병사들의 최후는
군사재판으로 끝났다.
재판관은 묻지 않았다.
“왜 총을 들었는가.”
“왜 명령을 거부했는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그들은 국가에 의해
이념의 족쇄가 채워진 채
총살됐다.
어떤 병사는 죽기 직전
이마에 태극기를 붙여달라 했다.
“그래도 나는 이 나라 사람이니까.”
그는 총살되었고,
태극기는 피에 젖어 땅에 묻혔다.
토벌 작전은 선별 없이 확대됐다.
남도 깊숙한 마을들까지 수색이 이어졌다.
한 가족은 ‘반란군에 쌀을 줬다’는 이유로
모두 끌려갔다.
노모는 경찰서 앞에서 말했다.
“우린 쌀밖에 없었어요.
그게 죄라면, 우리가 죄인이지요…”
그녀는 3일 뒤,
송정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간첩은 누구였는가.
죄인은 누구였는가.
그것을 말할 사람은 없었다.
모두, 두려워 침묵했다.
두석은 한때 제자였던
여수 출신 병사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노인은 마당에서 죽은 채
손에 아들의 사진을 쥐고 있었다.
“얘가 나라를 위했는지
나라에게 죽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두석은 돌아오는 길,
바람 부는 갈대밭에서 눈을 감았다.
모든 갈대가
한 방향으로만 흔들리고 있었다.
#작가의 말
누가 명령을 내렸고,
누가 거역했으며,
누가 희생되었는가.
여순 사건은
단순한 군 반란이 아니다.
국가가 정당한 권력을
‘절대 명령’으로 둔갑시켜,
양심과 생명을 눌러 죽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죽음을 오래도록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말하지 못한 자들의 시대,
그게 바로 한국 현대사의 ‘침묵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