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세계와 내부세계
내가 주로 쓰는 글들은 '역학 '철학''명리''심리''마음 챙김' '마음공부' '영성'과 관련된 글 들이다.
왜 역술 상담가가 사주팔자 보는 법이 아닌 내면과 심리에 대한 이런 글들을 주로 쓸까?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통제불가능한 상황에서 불안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주체적으로 써먹을 줄 아는 사람들은 명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면 큰 무기가 된다.
그러나 나를 써먹을 줄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통제와 예측이 불가한 운의 영역 앞에서는 무기력한 객체가 된다. 쉽게 말해 운에 휘둘린다. 그러니 명리를 알아도 실제 자신의 삶에 써먹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이나 예측불가능한 상황을 만났을 때 궁극적인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점이나 사주를 본다. 나 역시 명리학을 직접 공부하게 된 계기가 여기에 있다.
현대사회는 점점 더 빠르게 변화하는 지식정보화사회로 이제 AI가 인간의 고유영역까지 지배해 가고 있다. 세상은 점점 더 불연속적이며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으니 MZ세대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느 세대보다 커져버린 지금이다. 최근 나를 이해하는 도구로 MBTI와 사주가 젊은 사람들에게 열풍이 되었다. 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아주 좋은 현상이지만 한편으로는 본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자아를 16가지로 분류된 유형에 끼워 맞추고 이해하려고 든다는 점은 아쉽다. 사주도 마찬가지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예측, 자신의 운의 흐름을 보고 삶에 활용하기보다는 그저 타고난 팔자나 운이 좋으면 노력없이 운을 기대하거나 힘든 팔자나 운이면 개선에 대한 의지보다 팔자탓을 하며 이생망을 외친다. 이런 현상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불러온 유행이란 사실이 좀 씁쓸하다.
운이라는 거대한 파도 안에서 흐름을 깨우쳐 물살을 즐기는 서퍼로 살아남을것인가? 거친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인가? 과연 어느 누구도 후자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사주팔자를 이해하고, 운이라는 실체 없는 그것이 어떻게 나의 현실에 나타나는 지를 알아야한다. 그것을 알아가기 위해 명리만한 무기가 없다.
만물이 드러나는 낮이 현실이라면 만물이 어둠 속에 숨는 밤은 내면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보이는 것 드러난 것 그것만이 사실이며 실체라고 생각하는 오류 속에 살아간다. 즉 보이지 않는 내면, 경험 한 적 없는 내부세계는 잘 모를뿐더러, 잘 이해 되지도 않으며, 잘 알고 싶지도 않다.
동전을 예로들자. 우리가 사는 지구는 3차원의 물질계이다. 우리의 눈은 입체물의 양면을 동시에 관측할 수 없습니다. 즉 내가 지금 동전의 앞면을 보고 있다면 뒷면은 관측할 수 없다. 그러나 볼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동전의 뒷면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동전의 앞면은 현상이고, 내가 보고 있는 현실이다. 동전의 뒷면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이면이며 내가 상상하고 생각하여 만드는 현실이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사람은 제발 점 보러 다니지 말고, 사주팔자 보지 말아라. 차라리 그 돈으로 맛있는 거 한번 더 사먹자. 주변에 보면 정말 고집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자기 경험에만 의존적인 휴리스틱적 성향이 강하고, 공감능력이 부족하며 자기중심적이다. 이런 사람들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그냥 제 잘난 맛에 살다가 가게 두는 게 답이다. 부정적인 생각과 피해의식, 자기 우월감의 환상에 빠진 사람들 만큼 상대하기 힘든 사람도 없다.
나의 글을 읽어야 할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세계를 믿는 혹은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외부세계 이면에 내부세계가 존재함을 이해하고 있으며 자아 너머에서 끌어당기는 초월적인 차원이 있음을 느낀다. 즉 벽이 말랑말랑해서 언제든지 허물거나 침투하여 신성과 자아가 공존할 수 있다.
특히 배움의 그릇이 크고 인격까지 좋은 사람들은 내부세계를 컨트롤할 줄 알게 되면 자신의 운명을 개선할 수 있다. 책을 좋아하며 읽고 사유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능력과 이타적인 덕목을 가진 이런 사람들이 참 좋다. 이런 사람들과는 주파수의 공명이 잘 이루어지고 교류할 때 편안함을 느낀다. 내가 주고 싶은 것이 더 많아진다.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남을 행복하게 할 때이다.
우물 안에 개구리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만나는지 주변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주 지대하다.
사람이 엄청 똑똑한것 같아도 결국 자기 수준은 자신이 소속된 집단에 기본값을 맞추기 때문이다.
고만고만한 돈을 버는 사람들 무리에 속해 있으면 대화의 주제도 늘 고만고만하다. 그들이 사는 만큼 살면 되는 거라 자기발전이라봐야 그들 보다 좀 더 잘나보이고 싶은 욕심뿐이다.
나는 한 달에 500만 원을 받고 부장이라는 직함을 달았는데, 내 친구는 한 달에 400만 원을 받고 아직도 과장이구나, 내 다른 친구는 아직도 한 달에 300만 원 밖에 못 버니 나는 참으로 우월하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창회를 나갔는데, 내가 제일 잘 나가는 줄 알고 있다가 한 친구가 부장으로 승진을 했다며 한 달에 700만 원을 번다고 자랑을 한다. 그러면 나는 그 친구보다 못 버니 2등으로 찌그러지는 느낌과 동시에 500만 원에 대한 만족감은 확 줄어든다.
세상엔 한 달에 1천만 원, 1억을 버는 사람도 수두룩한데 고작 나의 수준을 가르는 잣대라고 내세우는 것이 주변사람들과 비교한 직급과 소득의 수준일 뿐이다.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고작 승진하고 돈 많이 벌어 주변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인가? 단언컨데 우리가 살면서 하는 모든 일들은 부업일 뿐이다. 우리가 세상에 온 진짜 이유, 우리의 본업은 내 안의 신성을 찾고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우물 안에 개구리가 우물 밖을 지나가는 바다거북이를 보고 말한다. "야. 너는 등에 뭘 그렇게 무겁게 지고 느릿 느릿 기어서 어딜가니? 밖은 너무 더워. 너도 우리 우물에 들어와 봐. 이 안엔 시원한 물도 있어." 거북이를 보면서 개구리는 우쭐대며 말했다. 바다거북이는 우물위에서 중얼거리는 개구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저분한 물이 고여있고, 돌사이에 이끼가 잔뜩 낀 우물이였다. 바다거북이는 그저 우쭐해하는 개구리 곁을 웃으며 지나갔다.
우물 안에 개구리는 아는 것이 우물뿐이다.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했으니 분명히 존재하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면 죽을때 까지 모르는 채로 살아야할까? 우물밖에는 더 넒은 세상과 깨끗한 연못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데 말이다.
개구리처럼 우물안에서만 살지? 밖으로 나와 더 넓은 연못을 찾아 떠날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물론 바깥세상은 위험할지 모른다. 천적을 만날 수도 있고,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것이 두려워 우물에 머물기로 한다면 그것 역시 당신의 선택이다. 위험을 무릎쓰고 우물 밖으로 나와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기로 하는 것도 당신의 선택이다. 그러나 시도하지 않으면 인생역전은 없다. 당신의 인생은 여전할것이다.
그럼에도 우물 밖으로 나와 연못을 찾아가기로 마음 먹은 개구리는 연못을 찾는 과정을 통해 성장을 할 것이다. 성장의 과정을 거치면 내가 원래 개구리가 아니라 바다 거북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자신의 본성을 찾고 바다라는 더 큰 세상을 영위하는 거북이가 될지, 우물을 지키는 개구리로 살다 죽을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당신이 어떤 것을 선택하든 당신은 당신이 생각한 대로 될것이다.
당신의 현실은 당신이 만들었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현실은 모두 우리 마음에서 창조된 것이다. 사는 꼬라지가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고? 나는 이런 현실을 만들지 않았다고? 과연 그럴까?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양새만 보아도 얼마나 타인을 의식하고, 인간관계를 힘들어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많은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불만족 스러운 현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다 당신이 창조했다고 하니 심기가 불편할 것이다.
이런 두려움과 고통이 어디서 부터 비롯되는지를 알아야 근본적인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 존재하는 법칙중의 하나는 인과의 법칙이다. 모든 것은 원인이 존재하며 그 원인이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문제의 원인을 해결할 방법은 점도 사주도 아니다. 오로지 모든 것을 창조해 내는 나의 마음뿐이다.
인간이 가장 큰 공포를 느끼는 순간은 생명이 위협을 받을 때다. 생명이 위협을 받는다는것은 안전한 환경이 보장되지 않는 다는 것이며 그것은 예측불가능과 불확실성을 포함하고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은 기본적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은 예측을 하려고 든다. 물론 예측 역시 어디까지나 확률에 근거한 것으로 불확실성을 낮출 수는 있지만 제거 할 수 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계획을 짠다. 자신의 미래를 뜻대로 끌고가 보겠다고 말이다.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날씨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처럼 신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기우제를 지내지 않는다. 예측이 가능해진 날씨는 비가 올 확률이 몇%인지 맑은지 흐린지 바람이 많이 부는지 미리 알려주어 일상생활에 대비할 수 있게됐다. 그러나 우리는 날씨를 예측 할 수 있을 뿐 날씨를 바꿀 수는 없다. 그저 우리는 자연앞에서 피동적인 존재 일 뿐이다. 가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언제 쯤 비가 올지 예측 할 수 는 있지만 비구름이 정확하게 해갈이 필요한 곳을 통과하며 충분한 비를 뿌리게 할 수도 없다. 그저 우리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 존재다. 인간의 의지는 예보를 확인하며 날씨에 맞는 옷차림을하거나 우산을 준비하는 것 뿐이다. 우산을 준비했는데 비가 오지 않거나, 우산을 두고 나갔는데 비가내린것처럼 우리의 계획이 그대로 진행되기에는 세상엔 예측이 불가한 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그러니 우리가 계획한대로 삶이 흘러갈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냐는 말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불연속적이고 불확실적인 영역들이 예측가능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생겼다. 바로 불확실성과 예측불가능에 대한 과도한 불안과 두려움이 너무 커져버렸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을때 불평불만이 생긴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무기력해 질 것이다. 우리의 자아는 이런 통제 불가의 상황에 놓이는 것이 몹시 불편하다. 자아는 두려움과 겁이 많은 존재로 늘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며, 외부자극으로부터 자를 보호하고 지켜내려는 본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측불가의 상황을 맞닥들이거나 나의 자아가 상처를 받는 상황이 발생했을때 온갖 우연의 사건들을 다 긁어모아 인과의 설명을 완성한다. 이걸 자기합리화, 방어기제, 자의식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자기 방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면 정신병리적인 문제가 생기거나 '미신'이나 '음모론'같은 환상오류나 잘못된 신념을 갖게 되기도한다.
점술의 역사는 아주 오래됐다. 기원전 원시종교의 샤머니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존재다. 시대가 이렇게 변했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미래를 점치기 위해 무속인을 찾아가며 사주팔자를 통해 운의 흐름을 예측하고 싶어 하는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자기 통제력이 약한 사람들은 점술의 결과에 상당히 의존적이다. 점의 결과가 좋으면 노력을 하지 않고, 결과가 나쁘면 지레 포기한다. 그나마 포기하면 양반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구할 때까지 이 집 저 집 도장 깨기 하면서 점사마저 조작한다. 당신이 절대자라고 생각해봐라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을까?
실제로 지인 중에 대부업을 하던 사람이 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용하다는 무당에게 점을 보고 왔다며 하는 말이 무당왈: 자네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내 땅이다~!" 하고 살 팔자라고 했다며 자기는 부자팔자를 타고났다며 자랑을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무당의 말을 너무 철석같이 믿었는지 분수에 넘치게 무리하게 일을 벌였다. 지금은 쫄딱 망해서 가족이 하는 음식점에서 배달일을 하고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동네구역을 누리는 모습으로 살고 있다.
반대로 자기 인생에 대한 통제력이 강한 사람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즉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보는 편이다. 자기 합리화를 시키기보다는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며 혼란에도 상당히 느긋한 태도를 보인다. 불행도 자기 인생의 일부임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며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결과에 크게 저항하지 않는다.
대체로 이런 부류들은 다양한 삶의 경험을 통해 축적한 지혜가 많으며, 자존감은 높지만 겸손한 특징이 있다.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가 높으며, 자신의 직업적 자기 효능감을 많이 체험하거나, 정신적으로 가치 있는 삶, 타인을 위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의 현실을 내가 창조했다는것이 앞에서 설명한 것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인간은 하나의 소(小)우주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 현실을 창조하는 신성을 가진 존재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처럼 우리의 언행은 곧 현실로 드러난다. 그러나 생각의 씨앗이 현실에서 드러나는데 까지는 현상계의 법칙에 따라 시간이 소요된다. 마치 절기처럼 말이다. 매년 2월 초가되면 우리는 입춘이라는 절기에 들어선다. 그러나 봄이라고 보기 무색하리만큼 겨울에 버금가는 추운 날씨다. 우리가 체감하는 봄은 3월 말 춘분에 가서야 봄이 왔음을 체감한다. 가을도 마찬가지다 8월초가 되면 입추가 찾아오지만 실제 우리가 체감하는 가을은 9월말 추분에 가야 가을이 왔다고 느낀다.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기때문에 인간은 평상시에 생각과 말이 가지는 힘을 무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생각과 감정은 온 우주로 방사되며 당신에게 일어날 사건을 만들기위해 치밀하게 우연을 만들고 있다.
사람은 하루에 5~6만가지의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중 대부분은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이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물거품이다. 그런데 당신이 오늘 했던 그 생각들중 특정한 생각들은 머릿속에 각인된다. 주로 감정을 동반한 생각들이다. 문제는 우리가 걱정을 할 때 느껴버리고 마는 불편한 감정이다. 걱정은 안심이 되지 않아 속을 태우는 상태로 불안정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동반하게된다. 감정이 방사하는 에너지는 당신의 현실을 창조하는데 아주 강한 연료가 된다.
모든 감정의 근원은 다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깨달아야 우리는 현실을 바꿀 수 있다. 즉 자신의 감정을 안정된 상태로 잘 컨트롤 해야 당신의 현실도 원하는 것을 끌어당겨 올 수 있다.
내 경우도 그렇다.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어찌 욕망이 없을 수 있나? 다만 나에게 고통으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내 욕망에서 시작됨을 깨닫고 난 후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저 욕망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에는 집착하지 않았다. 그저 그 뿐인데 그날 이후 삶의 차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내가 원하던 것들이 아주 쉽게 현실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을 내가 해보니 이 좋은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커졌고 이 모든 과정에서 나의 본성을 찾게되어 이런 글을 쓰는 것이다.
돈도 결국 인간이 편의를 위해 만들어 낸 인습일 뿐이다. 무한한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그저 한점이고 그 안에 사는 우리는 먼지처럼 보이지도 않는 존재다. 그러니 허상을 쫓느라 삶의 본질을 잊고 속세에 빠져 허우적 거리지 말아라 길게 살아봐야 100년이고 우리의 생명은 무한하지 않다. 죽고나면 우리의 육체는 분해되어 다시 땅으로 돌아갈 것이고, 당신은 지구상에서 십원짜리 한장도 가져갈 수 없다. 오로지 우리가 죽음 이후의 세계로 가져갈 수 있는것은 살면서 당신의 영혼이 기억하는 것들 뿐이다.
파레토의 법칙
20%의 소수에게 80%의 부가 몰려있다는 법칙을 파레토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레토가 주장한 이론으로 저는 부의 영역에도 파레토의 법칙이 작동하듯, 운의 영역에도 파레토의 법칙이 작동한다.
이것을 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전체 인구 중 운이 좋은 사람들 20%가 좋은 운의 80%를 끌어다 쓰며, 나머지 운이 나쁜 80%가 좋은 운 20%를 나눠 쓴다고 생각한다.
재물의 형성을 놓고 말하자면 내가 일군 전재산의 80%는 인생의 20%에 해당하는 기간 내에 만들어진다.라고도 볼 수 있다. 부자가 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일정하고 꾸준히 모인 것이 아니라 어느 한순간에 운을 만나 폭발적으로 자산이 증가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자돈(씨드머니)이 때가되면 과실을 맺는 다는 것을 잊지말아야겠다. 종자돈이 중요한걸 알았다면 푼돈이라고 우습게 쓰는 사고방식부터 고치자.
더 많은 파레토 법칙의 쉬운 예를 위키백과에서 발췌했다. 뭐 하나 틀린말이 없으니 읽어보고 곰곰히 생각하여 자신의 태도와 삶을 성찰해보길 바란다.
-통화한 사람 중 20%와의 통화시간이 총 통화시간의 80%를 차지한다.
-즐겨 입는 옷의 80%는 옷장에 걸린 옷의 20%에 불과하다.
-전체 주가상승률의 80%는 상승기간의 20%의 기간에서 발생한다.
-20%의 운전자가 전체 교통위반의 80% 정도를 차지한다.
-20%의 범죄자가 80%의 범죄를 저지른다.
-성과의 80%는 근무시간 중 집중력을 발휘한 20%의 시간에 이뤄진다.
-두뇌의 20%가 문제의 80%를 푼다. 우수한 20%의 인재가 80%의 문제를 해결한다. 혹은 뇌의 20%만 사용하여 문제 해결에 필요한 80%를 해결한다
-운동선수 중 20%가 전체 상금 80%를 싹쓸이한다.
-인터넷 유저의 20%가 80%의 양질의 정보를 생산한다.
변화의 본질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세계는 애당초 불평등하며 불확실한 곳이다.
결국 찌질한 현실을 바꾸려면 내가 20%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명리를 아무리 공부해도 내 정신이 변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같은 사주를 가졌다고해서 사람의 성품까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주팔자만 가지고 선과 악을 나눌 수는 없다. 똑같은 사주를 가졌더라도 어떤사람은 의사가되고 어떤 사람은 살인자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의사나 살인자의 사주는 상당히 유사함을 많이 가진다. 그런데 누구는 칼로 생명을 살리고 누구는 칼로 사람을 죽인다. 이것을 사주만 보고 의사다 살인자다 구분할 수는 없는것이다. 실제로 의사들이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많다.
개인의 성품은 사주팔자의 기질적 영향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상, 유전자, 환경, 무의식에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가 자신에 대해 알아갈때는 마음공부가 반드시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나의 신체와 정신의 음양이 조화롭게 공존하게 된다.
그럼 변한다는 건 무엇일까? 변화에도 수준이 있다.
1차적 변화는 변형(變形)이다.(형질의 변화)
포도라는 과일을 압착하면 포도즙이 되면서 고체->액체로 변한다.
인간은 성장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작은 크기(아기)에서 큰 크기(성인)로 크기가 변한다.
2차적 변화는 변성(變性)이 있습니다.(성질의 변화))
포도를 오랫동안 적정한 온도와 습도의 상태에서 숙성시키면 발효가 되어 포도주(酒)가 됩니다.
인간은 유아기-청년기-중년기-장년기-노년기를 거치는데 생애의 과정에서 신체적 정신적인 변성이 일어난다.
지금 당신이 40대라면 더이상 성장하고 발산하는 청소년기의 신체적 정신적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듯 나이를 먹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체적 정신적 숙성이 일어난다.
3차적으로는 차원이 달라지는 변역(變易)이 있다.(본질의 변화)
기독교에서 포도주는 예수의 피를 상징한다.
인간의 변역은 자신의 본성을 찾아 자아실현을 하는것이다. 자신이 유일한 존재이며 창조자임을 깨닫고 자기다움으로 변하는 것이다. 자기 초월에 성공하면 부처님처럼 여래를 보고 아미타불을 실현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쨋거나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힘들게 공부하고 좋은 직장 취직해서 승진하거나, 사업이 대박나서 돈많이 벌거나, 연예인들 처럼 유명해져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차 좋은집 살고 호의호식하다가 호화롭게 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니라는것이다.
우리모두는 신의 파편인 영이 있는 존재이며 자신의 본성을 찾고 스스로 변화됨으로써 이타적이고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배우기 위해 온 존재들이다. 우리가 아무리 물질을 소유해도 죽고나면 십원짜리 한장도 가져갈 수 없다. 오로지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닌 정신, 영혼의 성적표이다. 100년간의 생애를 통해 얻은 영혼의 성적표는 다음 생에 우리의 현실에 반영될 것이다.
역학은 단순히 물상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본질 적 차원을 바꾸는 역(易)의 학문이다.
물상의 변화만큼 심상의 변화를 같이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명리학을 제대로 습득하려면
반드시 나의 정신을 바꿔서 현실의 차원을 벗어나야 보이지 않는 내부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포도에서 예수의 피가 되고 인간에서 부처가 되는 차원적인 변역. 이 단계에 이르러 참 나를 찾고 참 된 변화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 궁극적인 신의 뜻이다.
정말 별거 아닌 이 단순한 이치를 알아차리면 현실의 나와 정신의 나를 분리시켜서 그 둘을
온전하게 경영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존재의 이유,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남과 나의 차이를 인정하게 되며, 남과 나는 결국 같음을 깨닫게된다. 이런 깨달음은 우리에게 서로 존중하며 용서하고 이해하게 만든다.
그러면 비로소 내가 편안해지고, 나 스스로를 환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저역시도 자기다움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에 있다.
뭔가를 알았다고 하기에는 한참 모자라고, 모르는 것이 많은 부족함이 있지만 늘 더 배우고 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주의 계획이니 서두르거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고 편안하다.
알아들는 사람들은 알아듣고 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할 것이고, 못 알아듣는 사람들은 아직 때가 아닌거다. 어차피 죽고나면 내 몸뚱이는 재가되어 사라지고, 성적이 지지부진한 영혼들은 다음생에 다시 인간세상에서 배워야 한다.
다들 욕망과 집착으로 스스로가 짊어진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으시고
내 시선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옮겨서 매일 혹은 가끔씩이라도 힘들어하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현실을 당신의 두려움에서부터 창조할 것인지, 당신의 사랑과 충만함에서부터 창조할 것인지는 당신이 결정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는데로 되기 때문이지요.
진정한 자유는 내안에 있는것이니 모든 사람들이 자유(自스스로자, 由말미암을유)롭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