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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이란 무엇인가

'들어가고 싶은 집'을 위한 살림력 키우기 10년

by 고갱이

어느 날, 먼저 결혼한 친구가 아직 미혼이던 나에게 말했다.


“너, 엄마가 살림해주는 지금이 정말 행복한 줄 알아. 난 요새 진짜 미치겠어.”


결혼한 지 몇 달 되지 않았던 그 친구는 남편과 매일같이 싸운다 했다. 살림때문이란다. 천 개의 촛불 사이에서 다이아 반지로 프러포즈받았다고 자랑할 때는 언제고 매일 치고받고 싸운다니. 그것도 빨래와 청소 때문이라니. 당시 나는 별로 동감하지 못했다. 아마, ‘엄마’와 같이 사는 미혼자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결혼했으면서 고작 그런 이유로 싸운다고?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가는 요즘, 문득문득 분노와 억울함으로 가득 찼던 그녀의 하소연이 떠오른다. 눈앞에 산더미같이 쌓인 설거지거리나 빨랫감이 보이면 특히 더 생각난다. 아침에 벗어던져놓은 속옷이, 그 부부를 그렇게 싸우게 만들었구나. 어제저녁에 함께 먹었던 식탁 위 눌어붙은 냄비가, 밤이면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징징거리게 만들었구나. 살림이, 정말 부부 싸움의 원흉이구나.

결혼 전에는 몰랐다. 사람이 먹고 자고 싸는 영역을 완성하는데 청소와 정리정돈이 필수 요건임을.


어렸을 때 살던 집을 떠올려보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늘 배부르고 쾌적한 곳이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나서야 집을 내 기준에 부합하는, 그러니까 배고플 때 뱃속의 허기를 채우고 더러울 때 몸을 깨끗이 하며 졸릴 때 따뜻하게 잘 수 있는, 그 최소한의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노동을 얼마만 한 강도로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로맨스 드라마는 전부 사기였다. 드라마는 남자 친구였던 남편과 팔짱 끼고 마트를 돌며 카트에 먹고 싶은 식재료를 담는데 까지만 넘볼 수 있는 영역이었다. 계산대 앞에 서는 순간, 선배들이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야.’라고 말했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고 굳게 믿어왔던 나 자신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시작은 이번 생활비는 누구 카드로 내느냐 같은 쪼잔한 문제다. 쪼잔해서 더 기분 상한다. 장바구니에 맥주캔이나 우유팩을 먼저 담을 것인지 양파를 먼저 담을 것인지로 욱하고, 제일 위에 랩으로 덮인 오징어를 올릴 것인지 미나리 한 봉지를 올릴 것인지 의견을 나눌 때쯤이면 싸움은 이미 시작돼있다.


하지만 신혼이니까, 백번 양보해 손잡고 웃으며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정리하고, 식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한다. 반짝이는 싱크볼 안에 생오징어 3마리가 시꺼먼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누워있지만, 사랑하는 남편이 매콤한 오징어볶음이 먹고 싶다는데, 이 정도쯤이야. 나는 오징어볶음보다 오징어 숙회를 더 좋아하지만, 비록 한 번도 오징어볶음을 만들어본 적도 없지만, 사랑하니까. 우리 사이 뭘 해도 재밌었잖아. 불과 두 달 전인 그날, 소주 한 병을 사이에 두고도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그 밤에도 즐거웠잖아. 오늘은 '우리' 집에서, '함께' 만든 오징어볶음에, 냉장고 '가득' 소주도 있겠다, 우리 더 행복할 거잖아.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 순서였다. 연애 때의 다음 장면은 집 앞에서 헤어지며 아쉬움의 '빠이빠이'를 나누는 것이라면, 결혼 후에는 음식물 쓰레기와 더러워진 식기로 폭탄을 맞은 부엌과 집안 곳곳에 배어버린 냄새 처리가, 그 '살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의 눈치를 본다. 여태껏 해 왔던 것처럼 이 남자를, 이 여자를,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만들어줄까 가 아닌, 이 남자가, 이 여자가, 어떻게 하면 이 뒤처리를 하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을 하고 작전을 짠다.


아무래도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건 아닌 것 같다.

토요일이다. 예쁘게 차려입고 아직 남자 친구인 것 같기만 한 남편과 외식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다음 화면이 2인분의 옷가지로 수북해진 빨래통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남편에게 빨래 좀 해야겠다고 말했다. 한 시간 후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세탁기가 고장 난 것 같단다. 그는 9kg짜리 드럼 세탁기에 액체세제를 뚜껑 한 가득 넣었을 뿐이라 했다. 그 날, 무려 5시간 동안 헹굼 코스를 돌려야 했다. 충격에 빠진 듯 본인은 빨래 세탁보다 빨래 개기를 담당하겠노라 선포한다. 군대에서 각 맞춰 수건 개기 같은 걸 배워온 덕에 개는 것은 자신 있는 듯했다. 나는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참고하여 양말과 수건, 속옷, 흰옷과 겉옷을 나누는 기준을 세우고 각각의 세탁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세제의 종류와 양, 세탁코스, 한국인의 직성이 풀릴 만큼 넉넉한 헹굼 횟수와 탈수 정도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 뒤로 그것들을 분류하여 빨고 널고 말리고 걷고 다림질하고, 세탁소에 맡겼다가 찾기까지의 일에 적응하는 데 2~3년은 족히 걸린 듯싶다.


청소는 가장 큰 관문이었다. 무궁무진한 이 청소의 세계는, 사실 아직도 100프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화장실에 락스와 청소솔의 조합, 이불을 비롯한 각종 페브릭 관리, 가구 위에 소복하게 쌓이는 먼지, 부엌의 찌든 때와 기름때, 장마철 습기와 곰팡이, 겨울의 건조함... 세상에 존재할 거라 예상조차 못한 것들이 계절과 날씨의 변화에 따라 마구 고개를 쳐들고 기어올라 나를 괴롭힐 때의 성가심이란. 거기다가 청소는 가장 큰 물리적 노동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손목과 무릎 관절 손상에 이어 허리까지 삐끗하고 나서야 나는 청소의 노하우를 하나 겨우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정리정돈, 즉 나의 청소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미리 제거하는 일이었다. 일단 나의 눈을 즐겁게 했던 모든 장식품과 아기자기한 생활용품들을 싹 치우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전부 창고에 넣었다. 카펫을 걷고 최대한 바닥에 물건을 놓지 않았다. 이 집에서 청소기와 밀대의 앞길을 막는 것들을 치우고 나니 한결 간단해졌다.


설거지는 식기 세척기가 없기에 전부 손 설거지를 해야 한다. 긍정적 사고가 필요했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가 되니까, 밥값을 하기 위해, 소화시킬 겸, 설거지를 한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외출했다 집에 오자마자 요리하는데 1시간, 먹는데 10분, 설거지하는데 1시간씩 시간을 보내면 화가 나고 지친다. 그래서 가끔씩 요리하는데 나의 1시간을 썼으면 설거지하는 데는 남편의 1시간을 쓰기도 하고, 요리하는 중간중간 설거지를 하면서 음악이나 팟캐스트를 듣는 등 최대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려고 노력도 하고, 아예 설거지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밥을 안 차릴 때도 있다. 그래도 설거지는 말 그대로 기분을 거지같이 만드는 노동이다. 아마 다른 식구들은 TV 앞에 앉아 낄낄거리고 있을 때 설거지하는 자만 혼자 음식물쓰레기와 기름기라는, 듣기만 해도 피로가 느껴지는 존재와 악전 분투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쨌든 난생처음 하게 된 ‘살림’을 이렇게 10년쯤 하다 보니 이제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이제야 겨우 어렸을 때 나의 집처럼, 따뜻하고 시원하고 편안해서 우리 가족이 ‘빨리 집에 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든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될 때까지의 나의 노오오력과 시간이 아깝거나 억울하거나 하지 않다. 가끔 꽤 철든 생각도 한다. 살림이라는 게 이렇게 큰 노동과 시간이 필요한 일인데 나는 전혀 몰랐구나. 우리 어머니 한 사람의 품이 오롯이 다 들어가야 했었구나. 정말 힘드셨겠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랬나 보다. 당신이 바보가 돼버렸다고. 살림을 사는데 젊음을 다 써버렸지만 세상 누구에게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데다 살림하느라 그 외에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돼버렸다고... 그러셨다.


나는 살림이 무엇인지 아는데 10년이 걸렸다. 이제부터는 이 살림이라는 노동이 왜 미니스커트를 입고 쎄시봉 한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듣던 똑똑하고 세련된 여대생을 '바보'로 만들어버렸는지, 진짜 '바보'로 만들긴 한 건지 생각해 볼까 한다. 빨래나 설거지를 할 때 사용되는 전문화된 세제의 세계, 얼룩과 때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발생하는 화학반응에 대한 경이로움, 먼지 제거 효과를 극대화시켜주는 정전기 파워, 바삭하게 잘 다려진 페브릭이 몸에 닿는 순간 느낄 수 있는 찰나의 감동 등에 무감각해지게 되면 나도 살림에 투입된 내 본전이 생각나게 되려나. 싱크대 앞에서 2시간 동안 다듬고 손질한 나물을 데치니 한 접시도 안 나올 때, 식구들은 어지르고 나만 치울 때, 그나마도 뭐만 없어지면 내가 모든 원망과 책임을 뒤집어써야 할 때, 배고프니 밥 달라는 말 외에는 오가는 대화가 없을 때, 그러다 문득 거울을 볼 때, 나도 내가 식구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늙어버린 '바보'가 됐다고 생각하게 될까.


그래서 내 시간과 노력을 보상받길 원하게 될까. 보상받을 곳이 없어 억울해 갈갈이 날뛰다가 몸이든 마음이든 집을 떠나가게 될지, 아니면 이 안에서 예상치 못한 보상을 받게 될지 나의 10년 후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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