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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수거와 프로의식

by 고갱이

매주 화요일은 우리 아파트 분리수거 날이다. 폭우나 폭설이 쏟아지는 궂은 날씨에도 화요일이면 주차장 한쪽에 분리수거장이 설치된다. 몇 시쯤 설치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새벽 4~5시쯤? 어쩌면 자정쯤? 어쨌든 달력 상 화요일이 된 시각, 쓰레기를 갖고 나갔을 때 미처 쓰레기장이 설치되지 않아 쓰레기를 못 버리고 돌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새벽부터 일상을 사는 사람들을 위해 더 이른 새벽부터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다. 티슈 케이스건 택배 상자건 상자는 무조건 전개도 모양으로 펼쳐 납작하게 만들고, 플라스틱과 캔, 비닐과 플라스틱이 결합된 것들도 가위나 칼을 이용하여 꼭 분리한다. 재활용 쓰레기는 설거지도 하고, 재활용이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것들은 종량제 봉투에 넣고, 음식물쓰레기도 그 규칙을 꼬박꼬박 지켜서 버린다. 그래도 부족한 점이 많다. 당장 오늘만 해도 뚱뚱한 팻트병을 그대로 버리며 ‘이것도 찌그러트려 버려야 하는데, 부피가 너무 커서 안 되겠는데...‘라고 잠시 반성했다.


처음부터 분리수거를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다.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쓰레기 버리는 게 너무 싫고 귀찮기만 했다. 주부라는 이유로, 이 집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쓰레기 처리가 내 일이 된 걸까, 내가 쓰레기나 버리려고 대학을 졸업했나, 이 집에는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이 나밖에 없나, 내가 사용한 물건도 아닌데 왜 내가 버려야 하나 등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동네 아줌마들을 만나 얘기해보면 한술 더 떴다. 비위가 약해 매일 아침 남편이 출근길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준다는 얘기, 분리수거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얘기, 분리수거 날에 맞춰 도우미 아주머니를 부른다는 얘기, 대충 하라는 얘기... 수다의 끝은 늘 ‘도대체 난 어디서부터 잘못 살았을까...’ 같은 자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재활용 쓰레기를 수거하러 온 업체의 직원의 말을 듣게 되었다.

"난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새끼들이 아니라고 봐요. 에이 씨팔, 개 같은 새끼들. 인간이 아니야"

아마, 내가 지나가는 줄 모르고 경비아저씨와 얘기 중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주민으로 보이는 내가 듣도록 일부러 내뱉은 말일 수도 있다. 무엇이 수거업체 직원을 이토록 화나게 했을까 생각해보니, 분리수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가 답인 듯했다. 재활용 쓰레기에 음식물을 섞어 버린다던가, 팻트병에 음료수가 들어있는 채로 버린다던가, 종량제용 쓰레기나 돈을 내고 따로 버려야 하는 쓰레기를 섞어 버렸다던가. 이런 경우 수거업체에서 재활용업체에 쓰레기를 넘길 수 없어 이를 처리하는데 따로 비용이 든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분리수거를 해도 재활용률이 낮은 이유 중 하나라 한다. 그 뒤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나는 사람새끼임을 증명하기 위해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고 있다. 까스활명수를 마시면 병은 유리병 주머니에 뚜껑은 캔 주머니에 따로 버리고, 뚜껑이 플라스틱인 우유팩이나 설레임 껍데기는 가위로 플라스틱 부분은 분리한 뒤 버리고 있다. 나름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귀찮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가끔 못 본 척 모르는 척 외면할 때도 있다. 그런 날은 사람 새끼이길 포기한 것같아 좀 우울해진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어마어마하게 추운 날씨였는데, 얼마나 추웠냐 하면, 집에서 종일 핫팩을 끌어안고 있다 그것이 식어 다시 데우고 싶긴 한데 이를 위해 이불 밖으로 나갈까 말까 한참 동안 고민할 만큼 추운 날이었다. 문득 창 밖 경비아저씨, 청소 아주머니 1, 청소 아주머니 2. 세 사람이 눈에 띄었다. 경비아저씨는 주차장에 쌓인 눈을 치우고 청소 아주머니 1은 현관 계단에 낀 살얼음을 깨고 청소 아주머니 2는 복도를 치우고 계셨다. 나는 집에 있는 1회용 핫팩을 모두 갖고나가 청소 아주머니 1에게 드렸다. 다짜고짜 아줌마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호칭을 뭐라 해야 할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저기... 이것...”하면서 별 말없이 드렸다. 고맙다는 말을 뒤에 남겨두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떨렸다.


경비 아저씨는 비바람에 젖고 날리는 종이 박스를 정리하고 쓰레기 더미 위에 쌓인 낙엽과 눈을 치운다. 청소 아주머니 1과 2는 비나 눈이 오는 날에도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잘못된 분리수거를 다시 한다. 추운 겨울에 계단과 난간을 닦는 걸레를 화단 옆 수돗가에서 손빨래 한다.


"공동 세탁기 없어요?" 내가 물었다.

관리실에 있는 공동 세탁기는 작업반장님들의 작업복을 빠는 용이라 걸레를 빨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손으로 빨아야 한단다.


물론 그들이 무료 봉사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돈을 번다. 월급을 받는다. 그렇기에 주민을 위해 이런 궂은 일을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얘기는 맞지 않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연세까지 이렇게 활발히 경제활동을 한다는 건 백수인 내가 감히 평가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돈을 버니 마땅히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다. 매달 내가 관리비를 낸다는 의미가 그들이 나를 대신해 분리수거를 해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이 청소할 것이니 공용주거공간을 더럽혀도 된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지, 나에게 직접 돈을 받지 않는다.




이들은 프로다. 회사 규정상 몇 시 출근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민들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 이른 시각에 재활용장을 열고, 제대로 처리 안 된 분리수거를 하고, 청소를 한다. 날이 좋으나 궂으나 열심히 성실하게 일을 한다. 프로의식이다.


요즘 난 분리수거를 특히 더 열심히 한다. 프로인 우리 아주머니들에게 혼날까 봐 최선을 다해 꼼꼼히 한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칭찬을 받은 적도 있다. “이렇게 비닐을 묶어서 갖다 주면 우린 너무 편해. 고마워요.”


난 청소 아주머니 2가 특히 멋있다. 매일 완벽한 풀메이크업과 입술 색과 똑같은 빨간 자가용도 멋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호통이 멋있다. 분리수거가 안 되는 쓰레기를 들고 나온 주민이 작업용으로 펼쳐놓은 100리터짜리 업소용 쓰레기봉투에 자기 쓰레기를 버렸다. 이에 아주머니는 “이봐요! 이 쓰레기봉투는 내가 회사 돈으로 산 내 회사 봉투요! 어째서 지금 당신 쓰레기를 여기다 버리는 것이오!!!”라고 소리쳤다.


비상구 계단에서 아주머니를 마주친 적도 있다. 성질 급한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해 자주 계단을 뛰어오르는데, 그날 아주머니는 계단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아주머니는 허리를 숙인 자세로 계단의 신주(미끄럼 방지를 위해 붙여놓은 동색 선)에 냄새가 독한 화학 세제를 뿌리며 닦고 있었다.


"거길 왜 닦으세요? 닦지 않고 쓸기만 해도 되지 않을까요?" 내가 물었다.


"사모님 내일모레 우리 아파트 물청소하는 거 아시죠?"


"네. 공지 봤죠. 자전거 치우라고 방송도 나오던데요."


"그거 외부 언니들(타 청소업체 직원)이 기계 갖고 와서 복도 물청소 싹 해주는 거거든. 근데 그 언니들이 우리 집 와서 더럽다고 흉보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우리가 미리 깨끗하게 닦아놔야지. 안 그래요?"


"....?........... 아........."


우리 집이라니.

두근두근했다.


프로의식.

아무리 하찮은 취급받는 일을 하더라도 그 일 앞에 서있는 사람이 세상의 편견을 사라지게 만들기도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사람을 빛나게 만든다. 사람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을 갖게 된다. 마주치기를 기다리다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인사를 건네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내가 내 일에 프로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였다.


우리 아파트 경비 아저씨와 청소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에서 오랫동안 일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나는 프로의식을 가진 주부의 자세로 완벽에 가까운 분리수거에 도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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