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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하고 살까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겁니까

by 고갱이


더워서 깼는지 깼더니 더웠는지 잘 모르겠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눈을 떠서 처음 느낀 것은 끈적끈적한 땀이었다. 우리는 동네 빵집에서 각자 좋아하는 빵을 하나씩 사들고 스타벅스와 도서관을 전전하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사이사이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녹아내리는 아스팔트 위를 걸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오로지 다음 목적지에 있을 시원한 에어컨만을 상상했다. 강한 햇빛에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됐고 피부는 따끔거렸지만 에어컨을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다. 그늘에서 그늘로 점프하여 이동하고 싶은, 아주 더운 여름이었다.


점심은 집에서 바지락 칼국수를 끓여먹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칼국수를 끓일 것을 생각하니 아득해지긴 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제대로 해 먹고 싶다. 본래 모든 것을 갖춘 상황에서 안 하는 것에는 당당해 그 게으름과 나태함을 즐겁게 누릴 수 있지만,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그것을 핑계 삼아 안 하는 것에는 비굴함을 느끼는 건, 내 성격이다. 나는 이 날, 밥에 내 자존심을 걸었다. 냉장고에는 어제 새벽 아파트 장에서 사놓은 싱싱한 바지락이 있었다. 큰 솥을 꺼내 바지락을 가득 넣고 호박, 쑥갓, 청양고추 한 조각도 송송 썰어 넣고 칼국수를 끓였다. 비주얼도, 맛도,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끓인 것이 전혀 티 안 나게 좋았다.


저녁에는 햇반을 데웠다. 복숭아가 소시지 반찬을 해달라 했다. 나는 문어모양으로 자른 소시지를 역시 휴대용 가스레인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끓는 물에 데쳐냈다. 조금 색다르게 하고 싶어, 문어의 머리를 자르고 세우니 영락없는 꽃이 되었다. 가운데 빨간 케첩을 톡 떨어드리는 것으로 소시지 꽃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에미가 소시지로 꽃을 만들든 머리에 소시지를 꽂든 전혀 신경 안 쓰는 쿨한 성격의 딸이지만, 이 더운 일요일, 인덕션이 고장 났다는 이유로 사 먹지 않고, 그래도 밥상에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 나는 뿌듯했다.


사실 내가 차리는 밥상은 솜씨 좋은 엄마들의 식탁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다. 밥과 찌개, 반찬 한두 가지가 전부인 아주 작은 밥상이다. 안 차릴 때도 많지만 차릴 때는 그 밥상을 위해 나는 매번 최선을 다한다. 최선을 다 한 것이 3첩 반상이냐 물으면 할 말 없지만 최소한 날씨나 도구의 부재에 굴하지 않는다.

"대충 하고 살아."

사람들, 특히 같은 주부들이 나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아유, 복숭아 엄마.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힘들게 왜 그러고 살아? 대충 해, 대충. 그래도 괜찮아."


대충.


체력도 약하고 짜증도 많은 나를 위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여태껏 대충 살았다. 학생 때는 공부를 대충 했고, 직장 생활도 대충 했다. 친구 관계도 대충 맺었고, 가족과도 대충 살았었다. 열심히 살아본 기억이 없다. 내 인생에 애틋한 순간이, 없다.


서른 넘어 내 가족을 만나 얼떨결에 주부가 되고 나서야 나는 그동안 내가 대충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살아볼까.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사는 방법을 모른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는 것이 열심히 사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혹시 대충 산 대가로 주부가 된 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주부는 직업으로 당당히 인정받기는 커녕 하루빨리 소멸되어야 할 인습에 불과한 쪽으로 사회적 잣대가 기울고 있다. 한 번도 최선을 다해 살아 본 적 없는 내가 이제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어 졌는데, 맡게 된 일이 하필이면 남들이 할 필요 없다고 말리는 일인 셈이다.


글쓰기를 시작할 때 추천받은 몇몇 책을 읽었을 때,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정말 내가 하는 주부 일은 같은 여자가 느끼기에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일까. 주부 일 말고 그 어떤 다른 일은 최선을 다하기에 부끄럼이 없을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내가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세상에 이바지할만한 능력을 발휘하게 될까. 여태껏 깊은 숲 속 고사리처럼 그늘에서 조용하고 낮게 살던 나다. 복숭아를 '아침을 먹지 않는 아이'로 키우지 않는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걸까. 여자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옭매고 있는 걸까. 외식을 싫어하고 냉동식품은 귀신같이 알아내는 내 아이는, 진짜 나의 족쇄인 걸까.


오늘 나에게는 여성 평등, 아동 학대, 남북 평화, 환경오염으로 인한 이상기온, 난민 개방, 청년 실업, 자기 계발보다 일요일에 고장 난 인덕션을 옆에 두고 휴대용 가스레인지 앞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학교 다닐 때 공부에 최선을 다하지 않아 나의 의식이 이 정도밖에 발전하지 못했다면 할 말없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이것이 나름의 최선인 것 같아, 제 딴에는 부단히 노력하건만, 자꾸 옆에서 '그런 일'은 할 '필요 없다' 고 하니 화가 난다.

"말해봐.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네 청춘을 갖고 뭘 했니?"


라는 시구가 생각난다. 난 내 청춘으로 딱히 뭐 하나 내세울만한 것을 이루어 낸 적이 없다. 후회하고, 반성한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열심히 하려고 한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일은,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양질의 밥을 먹이고, 청결을 유지시켜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다. 나에게 네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함으로써 너의 자아을 찾으라 하지 마라. 나도 '이렇게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 <삼십 세>, 최승자)을 맞이했고, 그때도 내가 살 가치를 느낄 만큼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했었고, 사십 세가 돼도 못 찾고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주부의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그래도 매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의 노력 자체를 부정당하고 싶진 않다.



*인용 시 : <하늘은 지붕 위로>, 폴 베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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