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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갱이 Jul 30. 2023

Epilogue


이탈리아 여행기를 이제 한 열 개나 채웠을까 하는 마음에 세어보니 열세 개나 썼다. 지금 쓰는 것이 열네 번째 글이다. 일주일 여행 갔다 온 걸로 열네 개씩이나 쓰다니, 잘도 우려먹는다. 그래도 잊기 전에 기록을 해 둘 수 있어서 다행이다. 딴에는 꼼꼼하게 쓴다고 썼는데, 벌써 빼먹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에어비앤비로 이틀 사흘씩 묵었던 집과 동네에 대한 얘기도 하고 싶었는데 못했다. 콜로세움 앞에서 얼음물과 일본식 종이양산을 팔던 사람들의 얘기도. 게다가 팩트 체크도 못했으니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도 있다. 나는 내 기억을 믿지 못한다. (그러니 여행을 앞두고 이 글을 읽은 분들은 꼭 한번 더 체크해 보시길. 정보제공차원의 글이 아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기억을 더듬어가며 되새김을 하는 것은 의미 있었다. 글을 한편씩 쓸 때마다 똑같은 장소를 다시 여행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이 역시 나쁘지 않았다.


여행은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로마 공항을 오가며 관광객들을 태우는 택시 운전기사를 만났다. 매일 새벽 바티칸을 드나드는 가이드를 만났고, 한국말을 하며 젤라또를 파는 직원을 만났다. 휴가철 에어컨이 없는 사무실에서 렌터카 한 대 서류 작성 하는 데에 몇 시간씩 실랑이를 하는 사람, 종일 지하 주차장에 머물며 렌터카 키를 건네주는 사람과도 만났다. 셀바에서는 동네와 집 자랑을 끝도 없이 늘어놓던 사장 할머니와 대화를 하고 같은 빌라 위아래 층에 묵으며 만날 때마다 친절한 미소를 보내는 애기 엄마와도 인사를 나눴다. 이 동네에는 3대째 식당을 경영하고 있는 가족도 살고 있었다. 알프스 산장의 친절한 보스, 영어를 못한다고 머쓱해하던 주방 청년도 기억난다. 무인 주유소에서 주유하는 방법을 몰라 난감해하던 우리에게 손짓 눈빛 다 동원해 열심히 설명해 주고 엄지 척을 날리며 사라진 베네치아 할아버지와 면세점에서 현금이 부족해 쿠키를 살 수 없다는 내 말에 빵 터져 웃으며 민망함을 없애주던 착한 직원, 두 분 특히 고마워요. 직접 만난 건 아니지만 집 나간 고양이 Flo의 주인과 빨랫줄 주민도 상상해 본다. 이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입국 심사장에서 여권을 돌려줄 때 느닷없이 윙크를 날리던, 이태리 꽃미남이지만.


여행을 계획한 장소에 '사람이 산다'라는 사실은 꽤나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마치 영화 속 인물들 같다. 그래서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그들에 비해 내 삶이 보잘것없이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단 며칠이나마 그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아볼 수 있었다.  그 안에서 걸으며 결국 그들의 삶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꿈같은 곳으로 여겨졌던 장소도 그냥 여러 현실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모두 정해진 시간에 맞춰 쳇바퀴 돌리듯 매일을 반복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난감하고 주눅이 들었다. 날씨가 더워 짜증을 냈고, 해야 할 일이 밀어닥쳐 화를 냈다. 


어쩌면 여행은 나의 현실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위로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쫓고 쫓기는 틈에 끼어 아등바등 거려 보지만 결국 이리저리 치이다 그로기 상태가 되어 밤을 맞이하는, 숨 막히고 답답한 일상이 결코 남들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는, 저어기 지구 반대편 사람들도 다 비슷하게 산다는, 그러니까 이 정도만 돼도 살만하지 않냐며,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재수 없는 인생은 아니라고. 그래서 당분간 또 그럭저럭 살아가게 만들어준다.


그러니 이제 다시 일상을 살 것이다. 여전한 루틴으로 채워지는 재미없는 생활일 것이다. 그 틈에서 여행 중 만난 몇몇을 떠올려 본다. 나는 작은 행복이라도 만들어내기 위해 유난히 기를 쓰던 몇몇을 봤다. 모두 자주 미소를 짓고, 작은 도움이라도 필요한 곳을 향해 몸의 방향을 돌리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좀 더 많이 웃으면 좋겠다.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만날 때마다 미소 짓던 위층 애기엄마처럼 말이다. 주유소 할아버지처럼 친절할 수도 있으면 좋겠다. 친절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감하고 씩씩하게 살아야겠다. 에어비앤비 사장님처럼 내 집을 사랑할 것이며 출입국 관리소 직원처럼 자연스럽게 윙크를 날리는 연습도 할 것이다. 그렇게 살면서 부지런히 돈을 모으다가 언젠가 또 삶이 무료하게 느껴질 때쯤 다시 여행을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트레치메 105번 길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왔다. 식탁 위에 두고 매일 본다. 낮이면 이 작은 돌멩이에서 앞서 걷는 남편과 복숭아의 발걸음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의 발에 치어 달그락 거리는 산 길의 소리가 들리고, 그 틈을 비집고 야생화가 피어난다. 해가 지고 벌들이 윙윙 거리는 소리가 잦아지는 밤이 되면, 그때부터 하얀 돌은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을 안 갔을 경우를 생각해 봤다. 우리는 어쩌면 새 자동차를 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새 자동차를 몰고 복숭아의 학원으로 학교로 라이딩하러 다니는 것보다 이 일주일 여행이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가져다주었다고 믿는다. 돌멩이가 우리 가족에게 그 이야기 속 의미를 오래도록 들려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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