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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부

by 고갱이

어느 날 아침 8시도 안된 이른 시각에 친정 조카가 집에 왔다. 1년 전쯤 가족들과 함께 한 번 놀러 온 뒤로 첫 방문이었다. 밥은 먹었냐 물으니, 아직 안 먹었단다. 대답하는 표정이 스스럼없고 자연스러웠다. 오빠네 부부는 맞벌이라 아이는 어릴 때부터 친가와 외가를 오가며 컸다. 새벽에 출근하는 부모를 따라 나오는 것도, 친척 집에서 아침을 먹는 것도 익숙한 듯 보였다. 오늘은 일정이 어긋나 양가 모두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고모인 나에게 온 것이다. 안쓰러웠다. 아무리 고모집이고 동갑내기 사촌도 있다지만, 이제 갓 열 살 넘은 아이가 낯선 집에 엄마 아빠 없이 종일 있기는 싫을 것 같았다. 어젯밤에 가기 싫다 울진 않았을까, 불편한 것은 없을까, 조카 기분을 어떻게 풀어줘야 재미있게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내 나의 염려는 노파심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아이를 맡기는 부모도, 맡겨진 아이 본인도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능청스럽도록 공손하게 배꼽인사를 하며 들어온 조카는 고모부와 나란히 앉아 아침을 먹은 뒤 복숭아(내 딸)와 함께 방학 숙제를 시작했다. 나는 아침 식탁에 숟가락 한 벌 더 올린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점심 때도 역시 평소 나와 복숭아가 먹는 밥상에 숟가락 한 벌만 더 올리면 될 것이다. 아이의 행동이나 표정이 하도 편안해 보여 나도 직장을 찾아 출근을 하고 내 딸은 할머니 집에 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아유, 그래도 그건 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나는, 아마 이래서 10년 넘도록 전업주부인가 보다.


외벌이 회사원의 월급으로 아이를 키우고 아파트 대출금을 갚으며 살기란 결코 녹록하지 않다. 복숭아의 친구 엄마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조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없는 한 외벌이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아이가 어렸을 때 육아 독립군이라 외치며 집에서 살림하던 엄마들은 알고 보니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 출발선에 선 자동차였다. 그들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기다렸다는 듯 하나 둘 직장으로 떠났다. 유치원 때부터 매일 놀이터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던 동네 엄마도 어느 날 갑자기 저녁 7시까지 학원 스케줄을 짜 놓았다고 말했다. 뿌듯함과 자신감이 흐르는 표정이었다. “정말 어렵게 잡은 기회예요. 친정 엄마도 와서 도와주시기로 했어요. 어떻게든 버틸 거야. 나도 이제 돈 벌어야지, 더 이상 이렇게 살긴 싫어.” 눈빛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축하해요.”

나도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면 아이가 배우고 싶다는 미술도 리듬체조도 시킬 수 있다. 논술이니 코딩이니, 엄마들이 입을 모아 말하던 '지금 해두면 좋은' 학원도 보내고, 1주일에 1번 주말에는 복숭아와 함께 바이올린 레슨도 받고 싶다.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연주는 어렸을 때부터 나의 로망이었다. 대출금 갚는 데 십시일반 보태고, 노후대책도 보다 여유롭게 세운다. 무엇보다 매일 목 늘어난 면티를 입고 집 주위 반경 1km만 돌며 살지 않고, 구두를 신고 가방을 들고 바쁘게 뛰어다닐 것이다. 영화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의 주인공 사라 제시카 파커처럼 부스스한 파마머리를 휘날리며 출근하고 퇴근길 역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린다.


열렬하게 사는 것.

그게 성공한, 아니 최소 옳기라도 한 삶의 자세 같다.


나물 2,000원어치 사서 다듬고 씻고 데치고 무쳤다가 3일 뒤 남은 것은 내 밥에 올려 비벼먹는 나는, 한 팩에 3000원짜리 나물무침을 사서 딱 한 끼만 먹는다는 워킹맘의 당당함이 부럽다. SNS에 올라오는 멋쟁이 직장맘들의 OOTD 사진도, 점심시간 한 손에 든 아이스커피 인증샷도 질투 난다. 맘 카페에 올라온 직장 상사 험담 글이나 집안일을 함께 하지 않는 남편을 흉보는 글은 읽기 싫다. 대학 친구가 회사에서 상을 받고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눈물이 났고, 금요일 밤 출장 가서 밤늦도록 호텔방에서 혼술 중이라는 톡에는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나는 어떻게 늙어갈까. 주부인 나의 인생은 내 어머니와 똑같은 모양으로 굳어지게 되는 걸까. 50년에 다가가는 긴 세월 동안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바닥 걸레질을 하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했다. 내일모레 팔십 인 어머니의 허리는 무너졌다. 양 무릎은 망가지고 열 지문은 닳아 없어졌다. 남은 것이라곤 뭉툭해진 손가락 밖에 없다. 어머니는 주부로 살아온 당신의 삶에 넌덜머리를 냈다. 결혼식을 앞두고 마냥 신난 나에게 절대 당신처럼 살지 말라고 소리치던 어머니의 화가, 하루에도 몇 번씩 환청처럼 들린다. 하지만 출산을 계기로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나서는 가족들을 등 뒤에서 배웅하고, 매일 저녁 돌아온 가족들을 눈앞에서 맞이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매사에 불안한 사람이었다.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또 다른 나였다. 가족들이 사회로 나가 있는 동안 나는 오늘 하루 이들이 무탈하게만 보내고 돌아오게 해 달라 기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빈 집에 남은 나는 어질러진 집안을 청소를 하고,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빨고, 장을 봐서 저녁에 먹을 음식을 준비한다. 식구들이 돌아오면 다시 집 안은 더러워지고, 세탁기에 빨래가 쌓이며 가득 채워놨던 냉장고는 텅 빌 테지만 그 살림은 끝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이면 나는 어제와 똑같이 떠나는 가족의 등을 바라보고 청소와 빨래와 요리를 할 것이다. 쳇바퀴 굴러가는 집안일에 경제적 보상은 없다. 주말도 휴가도 없다. 돈은커녕 집에 돌아왔을 때 어제 집안 상태와 오늘 상태가 같다는 사실은, ‘오늘도 이 주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오해를 불러올 뿐이다. 집안일이란, 그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라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억울하고 얄밉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진 요즘에야 주부의 일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긴 했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공공연하게 주부에게 ‘집에서 논다’는 표현을 사용했었고, 나의 성장기를 지배하다시피 한 이 표현은 아직도 나의 무의식에 자격지심처럼 새겨져 있다. 게다가 최근 들어 전업주부는 시류에 반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다.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 관한 잘못된 인습을 개선해야 하는 데에 암적인 존재로 취급받는 것 같다.


당신의 능력은 정말 아까워요! 생산성 없는 집안일에 왜 당신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거죠? 사회로 나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도우미를 고용하세요! 생활비도, 집안일도, 배우자와 동등하게 부담하세요! 전업주부의 모습은 자녀들에게도 결코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당신의 이름 석 자를 찾으세요!


사실 집안일이라는 것은, 주부 개인의 행복, 자존감, 가치가 빨래, 청소, 요리에 묻히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커감에 따라 생활비와 교육비는 점점 더 많이 들고 외벌이 남편의 퇴직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3000원짜리 나물 반찬을 사지 않고 2000원짜리 채소 한 단을 사는데도, 오늘보다 내일 더 가난해지는 것이 요즘 시대 외벌이 가정의 삶이다. 설상가상 눈 맞춤과 포옹, 환한 눈웃음 등으로 이 생활에 유일한 보상을 줬던 아이는, 이제 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등 뒤에 서있으라 해서 서있었던 내가, 항상 눈앞에 있으라 해서 있었던 내가, 엄마라고 부르면 빨리 대답하라 해서 그렇게 대답해줬던 내가, 이제 귀찮다한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월급에 지친 남편은 나에게 SOS 구조요청 신호를 간절히 보내고 있다. 말은 안 해도 눈빛이 그렇다.

전업주부는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그 필요성이 확연히 낮아지고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전업주부를 고집하고 있는 걸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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