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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과런닝

가족에게 베풀 수 있는 주부의 양보와 사랑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by 고갱이

아침에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이 런닝셔츠가 없다고 한다.

"나 갈아입을 런닝이 없어."

"...런닝이 또 어디 갔을까?"

"내 난닝구들이 다 어디로 갔지?"

"어딨긴 어딨겠어. 빨래통에 있겠지. 어떻게 하지?"

"괜찮아. 어제 입은 거 하루 더 입으면 돼"

남편은 주섬 주섬 벗어놓은 옷더미를 뒤져 간밤에 벗었던 런닝을 도로 입는다. 며칠 전에도 똑같은 일이 발생했었는데, 오늘 또. 아무래도 남편의 런닝은 좁은 서랍 안보다 빨래통 안을 더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하루빨리 걸레로 재활용되어 먼지를 닦고 싶거나.


예전에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친구가 부부싸움을 하소연을 했다. 싸우는 이유는 양말때문이란다. 남편이 양말 서랍을 열어보고 '양말이 없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너무 화가 나 며칠 째 냉전 중이라고.


"그게 왜? 빨면 되잖아." 내가 물었다.


"그걸 내가 왜 빨아? 지 양말이 없으면 지가 빨지 왜 내가 빨아?"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아... 그 뜻이구나. 그럼 남편더러 빨라고 하지."


"그러니까 자기가 알아서 빨면 되지 나한테 왜 굳이 그 얘기를 하냐고. 나더러 빨라는 얘기잖아. 나더러 왜 양말을 안 빨아뒀냐고 묻는 거잖아."


"싫다고 해. 난 당신 양말 빨기 싫으니까 직접 빨라고 해."


"어휴. 넌 결혼을 안 해서 내 맘을 몰라. 그게 얼마나 기분 나쁜데."


결혼을 안 했다는 것은 20년지기 친구 편을 들어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을 이날 배웠다.


이 얘기를 들은 지 10년도 훨씬 지났건만, 나는 그 날 그 친구의 싸움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남편의 비상용 새 양말을 쌓아놓고 산다. 양말 서랍에 양말이 없으면 얼마든지 새 것을 꺼내 신도록 구비해놓고 싸울 빌미를 완벽하게 제거했노라 자화자찬했는데, 미처 속옷까지 응용하진 못했다. 새 런닝을 사놓을 생각은 못한 것이다. 다행히 싸우지 않고 넘어갔지만, 만약 이 일 때문에 싸웠다면 정말 기분 나빴을 것이다. 새로 바꿀 소파의 디자인이나 자동차 브랜드 혹은 육아의 가치관이 달라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고작 속옷 때문이라니. 전자가 의견 충돌이라면 후자는 어디까지나 짜증이다. 짜증에서 촉발된 싸움은 선호하지 않는다. 상대의 연약한 감정을 할퀴고 시간이 지나도 녹지 않는 굵은 앙금만 남길뿐이라 최대한 피해야 한다.


런닝을 주문하기 위해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갔다. 세상 귀찮다. 이내 화면은 날렵한 콧대를 뽐내며 허리 손을 하고 있는 남자 속옷 모델들로 가득 찼고 이 모델들은 정말 조각같이 잘 생기고 몸매도 정말 좋지만, 어째서인지 마네킹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상품정보에 관심도 생기지 않았다. 똑같아 보이는 런닝셔츠 가격이 왜 2500원대부터 37000원대까지 있는지, 면 40수 60수의 의미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남편의 속옷을 사는 일은 마트에서 화장지를 사는 일과 같은 일이다. 나는 가격과 별점을 보고 결제했다.


런닝이건 화장지건 이 사소한 생활용품의 재고 파악 문제는 결국 집안일을 누가 하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결혼 전에는 너나 나나 전적으로 하지 않았던 일,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은 결혼함과 동시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리고 요리의 70%가 재료 손질인지 몰랐던 나는 신혼 때 장을 봐온 식재료가 뚝딱 음식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거지는 말하기도 싫다. 빨래도 마찬가지다. 햇살이 비추는 잔디밭 위에서 남편과 하하호호 웃으며 발로 밟아 빨래를 하고 반짝거리는 물방울을 맞으며 빨랫줄에 너는 것은 현실에서는 전무후무했다. 그저 빨아서 짜서 널어서 말려서 개고 일부는 다려서 각자의 서랍에 배달까지 해야 하는, 아주 길고 아주 귀찮은 일이었다. 청소의 고단함은 집안 가구 하단에 쿡 쿡 패인 청소기 자국이 증명한다. 이 일련의 업무 안에 양말과 런닝, 화장지 재고 관리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돈을 버는 대신 집에서 이 모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이는 상상만큼 폼이 안 날뿐더러 힘들기는 더럽게 힘들고, 무엇보다 열심히 해도 티가 안 난다.


그러니까, 우리 부부는 밖에서 일하는 자와 집에서 일하는 자로 나뉘었다 볼 수 있겠다. 만약 나도 출근을 한다면, 어쩌면 우리도 친구네처럼 런닝의 부재는 곧 싸움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만약 내가 지금 돈을 버는 일을 하고 있다면, 어쩌면 남편은 자신의 런닝을 한 스무 벌쯤 직접 주문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저한 업무분담 덕분에, 우리는 철저히 싸우지 않는다. 싸움을 피하기 위해 업무 분담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업무 분담이고 나발이고, 화장지는 내가 쓰기라도 하지, 여자인 내가 왜 남자 속옷을 사고 있어야 하나. 자기는 눈이 없나 손이 없나 왜 직접 사질 않는 걸까.


세탁기가 다 돌아갔다는 알림음이 들린다. 식구들 속옷만 빨랫대 한 가득이다. 널다 보니 문득 친했던 아기 엄마가 기저귀를 막 뗀 아기의 팬티를 다림질해 준다는 말이 생각났다.

"팬티를 왜 다려요?"

"그냥요. 소독도 되고 좋잖아요."

남편이 아닌 자식의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넓게 보면 가족에 대한 그 엄마의 정성이었다. 돈을 받고 하는 회사 일의 업무 분담인 것도 아니고 내 가족을 위해 하는 일이니 그래, 이왕 하는 일에 나도 좀 더 정을 붙여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대화였는데 까맣게 잊고 살았다.


물론 그 뒤로 내가 식구들의 팬티를 다림질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림을 대하는 뾰족한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고 해야 할까. 화장실에서 나오기 전, 다음에 들어올 사람이 편하게 슬리퍼를 바른 방향으로 벗어 놓기 시작했다. 내가 쓴 휴지가 마지막이었다면 다음 사람을 위해 새 휴지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여분의 밥이나 라면 정도는 항상 채워놓고 배고픈 자가 집에 왔을 때 설움은 느끼지 않도록 한다. 빨래통에 빨래가 가득 쌓인 것이 눈에 띄면 귀찮더라도 그 날 세탁을 해서 다음 날 입던 속옷을 다시 입는 일은 없도록 신경 쓴다. 내가 여자여서, 주부여서, 업무 분담이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나의 가족을 위한 배려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풀려 가능한 행동들인 듯싶다.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의 주부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 사회의 그릇된 구조이지 내 가족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종일 집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남편 속옷을 주문했다. 괜찮다. 다만, 내 속옷도 누군가 이렇게 챙겨주고 배려해주면 좋겠다는 좀 유치한 외로움이 느껴진다. 아니다, 그도 됐다. 내 속옷은 내가 챙길 수 있다. 나는 혼자서도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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