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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의 식생활

너구리의 설움과 샐러드 한 줌의 행복

by 고갱이

얼마 전 TV에서 혈당 관련 다큐를 봤다. 그 뒤로 나는 제 무덤 파고 들어가 앉았는데, 소개되는 당뇨병 환자 케이스마다 다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증상은 밥만 먹으면 정신없이 곯아떨어지는 것이었다. 혈당이 치솟기 때문이란다. 나도 점심만 먹고 나면 꼭 봄날 병든 닭처럼 시들시들 조는데 이런 장면을 봤으니, 그 날로 당뇨병 환자가 됐다고 자체 진단을 내리고 쪼그라들었다. 그런 날 보고 한 친구가 샐러드를 만들어 먹으라는 조언을 했다.


"인터넷에서 채소를 1~2kg 정도 주문해놓고 매일 점심으로 한 그릇씩 먹어봐. 몸이 가벼워질 거야. 닭가슴살이나 아보카도를 곁들여도 좋고. 남편이 보너스를 받아오면 '내 남편이 돈 많이 벌어왔네...' 하면서 블루베리도 사서 올리고, '이번 달은 월급이 적네...' 싶은 날에는 계란을 삶아 올려 먹어. 만날 커피만 마셔대지 말고."


듣고 귀찮다 흘려버리기에는 솔깃했다. 집에서 밥을 하는 주부의 입장에서 나를 포함한 식구들의 입맛을 모두 맞추기란 결코 쉽지 않다. 친한 동네 엄마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주말 잘 보내셨냐는 내 인사에 기가 막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한다.

"흥. 그럼요. 아~주 잘 보냈죠."

그녀는 토요일 점심으로 라면을 끓이리라, 수요일부터 2박 3일간 굳게 다짐하고 있었단다. 때가 되어 "오늘 점심은 라면이다" 했더니,

남편이 "난 신라면."

첫째가 " 난 비빔면."

둘째가 "그럼 난 짜파게티."

한 끼 라면 좀 먹으려 했던 것뿐인데 냄비만 세 개가 나오다니, 정말 괴로우셨겠다.

"난 너구리가 좋은데 그렇다고 또 냄비를 꺼내는 건 더 싫고."는 나만 들을 수 있었던, 그 엄마가 흘러 보낸 혼잣말이었다.


나 자신보다 가족들의 편의와 행복, 그들의 사회적 위상을 우선시하는 것은 주부라는 직업이 가진 본질인가 아니면 이 사회가 여자의 무의식에 새겨놓은 희생이란 모양의 세뇌인가. 직업적 본질이건 사회적 세뇌이건 이는 생활 곳곳에 스며들여 있다. 요즘은 그래도 많이 없어진 편이다. 몇 년 전 엄마들 사이에서 퍼진 <남은 우유 나눠마시기 운동>의 효과일지도 모르겠다. 엄마들은, 그녀들의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해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기 위해, 한 컵 남은 우유를 아이에게 양보하지 않고 꼭 반씩 나눠 마시기로 다짐했다. 우유가 먹기 싫더라도 '엄마도 입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보란 듯이 꿀꺽꿀꺽 아이 앞에서 함께 마시자고 했다. 양보하지 말자고, 다른 가족들을 위해 더 이상 나를 희생시키지 말자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래서인가, 요즘 엄마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건강하다. 우리네 어머니처럼 슬픈 그림자를 갖지 않았다. '아이와 남편은 백화점에서, 엄마는 시장에서' 같은 풍조는 이제 전시대의 유물이 된 듯하다. 실제로 나와 같은 주부인 내 친구는 본인은 백화점에서 명품 쇼핑을 하면서 아이에게는 꼭 시장 옷만 입히기도 한다. 어차피 1~2년 입다가 버릴 옷인데 애한테 굳이 비싼 옷을 사줄 필요가 있냐는 것이 그녀의 논리다. 하지만 이 같은 친구의 다짐도 마트에서는 무너진다.


마트는 가족 특히 내 새끼의 밥만큼은 잘 챙겨주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생활비를 아껴야 한다는 의무감이 가장 강하게 결합되는 장소다. 그리고 결론은 대부분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참자.' 다. 집에 신라면이 있고, 오늘 짜파게티와 비빔면을 샀는데, 너구리까지 또 사기란 좀 그렇지 않은가. 종류별로 라면을 구비하는 것은 주부로서 좀... 좀... 사치스럽지 않냐는 말이다. 너구리에 대한 나의 결연한 포기는 계산대에서는 '알뜰했다'는 뿌듯함과 더 나아가 '다이어트에 성공하겠다'는 자기 위로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주말 오후 3구 인덕션을 풀가동 하여 신라면과 비빔면, 짜파게티를 동시에 끓이고 있노라면 그 속도 같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나는 어디에서 너구리를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누가 날 위한 너구리를 끓여줄 것인가.

고등학교 때 야자 끝나고 집에 가면 엄마가 너구리를 끓여줬었는데. 엄마...

하필이면 너구리는 '먹을 것'이어서, 분노는 눈물 콧물 없이 말하기 힘들 만큼 끓어오른다. 너무나도 애잔한 서러움으로 넘어간다. 분노가 설움이 되는 데에는 식구들이 라면 한 그릇을 다 먹을 시간조차 필요하지 않다.


아무튼 치사하고 구차해 인정하기 싫지만 이토록 주부의 애환은 음식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날따라 친구의 샐러드 얘기가 솔깃한 이유는, 동네 어머니의 주말 라면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내가 채소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김치와 오이를 좋아했고 고기를 싫어했다. 볶음밥에 고기가 들어있으면 골라냈고, 도시락 반찬으로 스팸이 들어있는 날은 오이지 하나에 밥을 먹었다. 미역국에 소고기가 들어있으면 질색했고, 가사시간에 고기 요리 실습을 할 때는 코로 숨을 쉬지 않았다. 반 친구 엄마들이 간식으로 맥도널드 햄버거를 돌리면 패티는 빼고 먹는 아이였다. 고기 맛을 알게 된 것은 대학교에 들어와 술을 마시게 되면서였다. 지금도 고기는 안주로 먹는 수준이지 딱히 즐기지는 않는다. 그런데 고기 좋아하는 남자와 그의 판박이 딸과 함께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기 요리를 많이 하게 됐다. 나는 그들을 위해 삼겹살을 사고, 장조림을 하고, 생닭을 통째로 삶는다. (처음에 통 생닭을 만졌을 때 온몸에 돋던 소름은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손바닥만 한 스테이크를 사서 팬에 굽고, 등뼈 2kg을 사서 핏물을 뺀 뒤 감자탕을 끓인다. 나는 거의 먹지 않는 요리를 매일 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만들지 않는다. 시간도 부족하고 에너지도 없다. 그러다 보니 배는 술과 커피로 채우고, 떡이나 초콜릿, 과자 같은 정제탄수화물을 먹고, 면역은 계속 떨어지고, 피곤하고... 저런 홈쇼핑 영양제 판매용으로 맞춤 제작된 다큐를 보고 무덤 파서 들어앉기까지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아무리 요리하기 싫다 해도 내가 먹을 음식도 챙겨야겠다. 먹기 싫은 고기를 억지로 먹을 수는 없으니, 친구 말대로 초간단 샐러드를 만들어 먹어보자.


일단 토마토를 한 박스 주문하고, 쌈야채와 새송이 버섯을 한 팩씩 샀다. 끼니때마다 토마토를 한 개 썰어 복숭아와 반씩 나눠 먹는다. 고기를 굽고 난 팬에 내가 먹을 버섯을 굽는다. 상추는 미리 씻어놓아 한 줌씩 꺼내 샐러드로 먹거나 쌈을 싸 먹는다. 남편이 다음 달에 보너스를 받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블루베리도 샀다. 카드로 긁었다. 이 와중에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남편과 아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백수인 내가 고기를, 그것도 복숭아처럼 '구워 먹는 소고기가 제일 좋아.' 였다면, 마트에 갈 때마다 얼마나 서러웠을까. 내가 집어 든 상추와 버섯 가격표에 동그라미가 하나 더 붙어있겠다고 생각하니 깝깝하다. 고기 좋아하는 우리 복숭아, 커서도 구워 먹는 소고기를 계속 먹으려면 절대 주부가 돼서는 안 될 텐데, 아, 이것이 우리 어머니가 나보고 "집에서 살림이나 하고 자빠져있어 봐, 내가 그냥 콱!"이라 윽박을 질렀던 이유인 건가.


그러고 보니 평생 주부로 사신 우리 어머니는 무엇이 드시고 싶었을까. 지금처럼 "난 아무것도 먹기 싫다."라고 할 만큼 늙기 전, 젊은 여자였던 우리 어머니는. 아직은 건강한 몸으로 생활을 하며 끼니가 되면 배가 고팠을 우리 엄마는.


어쨌든 나는 고기가 아닌 채소를 좋아하고, 내 남편은 채소 정도는 배불리 먹어도 될 만큼의 돈은 벌어오는 사람이고, 이 채소들을 손쉽게 먹을 수 있는 팁을 전해준 친구가 있어 운이 좋은 편이다.


이미 수많은 시간 동안 가족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마나 웃는 얼굴로, 얼마나 맛있게,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는지 생각해본다. 내가 고생해서 만들었으니 너희는 무조건 맛있게 많이 먹어야 한다며 꽤나 위압적인 자세로 팔짱을 끼고 앉아 정작 나는 김치나 깨작거리고 술이나 마시진 않았을까.


어제저녁에는 돼지 불고기에 양파와 파를 잔뜩 넣었다. 나는 주로 양파와 파를, 가족들은 고기를 쌈에 싸 먹었다. 남편이 나에게 "웬일로 잘 먹네."라고 말했다. 고기 기름을 머금은 채소는 실제로 무척 맛이 좋았다. 오늘은 시금치와 낫또, 우엉과 계란을 넣은 김밥을 싸서 토마토와 먹었다. 보자마자 햄이 없다고 인상 쓰던 복숭아와 한 줄씩 먹었다. 맛있게 먹었다. 언젠가 남편은 열라면, 복숭아는 너구리 순한 맛을 먹겠다 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열라면에는 팽이버섯 한 주먹, 너구리에는 파 한주먹을 넣고 각각의 냄비에서 내 채소만 쏙쏙 골라먹으면 될까. 냄비 한 개를 또 꺼내지 않고도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챙겨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생각해봐야겠다. 음식 앞에서만큼은 서러운 주부가 되진 않을 것이다.


(... 쓰다 보니 내가 무슨 채식주의자처럼 느껴지는데, 그건 아니다. 눈앞이 부옇게 보일 때 소고기를 먹고 머리가 맑아지는 경험이 있는 내가 무슨 놈의 채식. 나는 주부 개인의 식성과 자기애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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