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하다 접시에 금이 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이가 나간 대접도 눈에 띄었다. 새 그릇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쇼핑을 정당하게 만들어 주는 '필요'는 늘 반갑다.
깨지지 않는 나무가 좋을까? 요즘 유행인 에스닉한 전원 라이프 인테리어 사진의 주인공인 나무 그릇을 검색했다. 나무 식기는 패일 경우 그 틈으로 음식물 찌꺼기가 배어들어가 화장실 변기보다도 더한 세균이 번식한다는 기사가 함께 뜬다. 안 되겠다, 나무보다 색감도 화사하고 튼튼한 법랑 재질이 좋겠다. 나에게는 이미 법랑 그릇이 두어 개 있다. 전자레인지에 넣지 못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도자기 그릇보다 가벼워 자주 사용한다. 이 그릇이 몇 개 더 있으면 좋겠다. 몇 개? 식구가 셋이니 피자 나눠먹을 접시 셋, 떡볶이 나눠먹을 그릇 세 개정도면 될까? 아, 맞다. 접시보다 면기가 더 급하다. 전부터 면기가 필요했다. 우리 집에는 라면을 편하게 담을 수 있는 크기의 면기가 없는 것, 같다. 밥그릇도 필요하다. 지금 있는 밥그릇은 십수 년 전 혼수로, 그러니까 나의 친정어머니 취향이 전적으로 반영된 것으로서, 밥을 적게 먹는 지금 식구들의 식생활과 맞지 않다. 항상 밥이 많다고 덜어내거나 남긴다. 쌀을 절약하기 위해 좀 더 작고 좀 더 오목한 그릇이 필요하다. 이왕이면 하얀색이 좋겠다.
쇼핑몰에서 그릇을 구경하는데 가슴이 답답해졌다. 가격은 천차만별, 디자인과 색상, 사이즈는 내가 왜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지 목적을 잊고 빠져들 만큼 다양했다. 노란 계란 프라이를 담으면 예쁠 접시, 요거트와 딸기 두 개 정도 담으면 깜찍할 볼, 초록 샐러드 위에 무화과를 올리면 완벽한 색감을 뽐낼 듯한 대접... 매번 주인공(음식)에 따라 배경(그릇)을 바꿀 듯이 덤벼들어 장바구니에 쓸어 담았다. 결제하기 직전, 총액이 뜬다. \388,940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가 싱크대 앞에 섰다.
이 곳에 그릇이 필요한가 아니면 나라는 주부가 갖고 싶은 것인가.
그릇이 있는 찬장을 들여다보니 접시와 볼 등이 있었다. 라면을 담기에 예쁘지 않지만 떡국은 담을 수 있는 제법 깊은 대접도 있었다. 밥공기와 국그릇은 세트로 무려 8쌍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나는 무엇이 '필요'해서 사야겠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혼수 그릇이 범인이었다. 나의 혼수 그릇은 요란하게 꽃무늬가 그려진 8인용 식기 세트다. 그 그림이 거슬린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보고 직접 고르라 했더라도 어머니와 함께라면 같은 것을 샀을 것이다. 어머니 취향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의 허전한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내가 사고 싶은 것을 샀었더라도, 지금쯤이면 똑같은 감정을 느낄 것 같다. 제 살림 10년이란 시간은 세상 꼴 보기 싫은 저 그릇들만 바꿀 수 있으면 부엌살림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다.
나는 법랑 그릇이나 하얀 대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 그릇들에 '싫증'이 난 상태임을 깨달았다. 유행이 지나 싫증난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필요로 착각했다.
꽃무늬 그릇들을 깊숙이 넣어버릴까. 그럼 음식은 어디에 담아먹지. 뭘 얼마나 사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계속된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져서 인터넷 쇼핑몰 화면을 껐다. 적당한 사이즈를 골라야 한다는, 디자인을 선택해야 한다는, 택배를 기다려야 한다는, 분리수거를 해야 한다는, 카드값이 청구됐다는, 그것들도 언젠가는 싫증 날 것이 뻔하다는 번뇌도 함께 꺼졌다. 시원해졌다.
예전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니멀리즘은 가난을 포장하는 라이프스타일에 불과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소유욕은 인간의 본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진대, 안 사고 버티면서 텅 빈 공간을 사랑하자는 생각은 가난에 대한 자위란다. 나도 이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찬바람이 불면 쇼윈도에 걸린 캐시미어 니트를 보고 마음이 설레지만, 종일 집에서 설거짓물을 튀기며 일하는 것이 주부의 현실이다. 매번 드라이를 맡겨야 하는 캐시미어 니트보다 면 100% 티셔츠가 더 편한 것 역시 사실이다. 주부가 캐시미어를 입고 청소기를 밀거나 변기를 닦으면, 좀 웃기지 않는가. 하지만 쇼핑몰에서 주문한 29,000원짜리 면티셔츠를 입으면서, 마음이 설렜던 30만 원짜리 니트를 외면할 수 있었다고 안도의 숨을 내쉴 때, 나는 내가 실용성을 내세워 가난을 포장했음을 인지한다. 필요와 실용성을 앞세운 미니멀리즘은 나의 경제력에 대한 포장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어찌할 것인가.
매일 빨아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사는 것도 우울한데, 금 간 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 생활을 하는 것은 지겹다고, 나도 설레고 싶다고, 10년 전 유행한 어머니 취향의 꽃무늬 그릇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으며 쿨하게 새 그릇을 주문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비용에 대한 부담을 실용성과 환경오염 등 각종 되지도 않는 번뇌로 고상하게 포장했음을 시인할 것인가. 그릇을 사지 않는 이유는 단지 마지막 단계에서 계산된 합계 금액 앞에서 마우스를 잡은 오른손이 떨렸기 때문이란 사실을, 과연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어머니가 사주신 이 그릇들은 왜 금이 갔으면서도 국물 한 방울 새지 않아 나를 이런 시험에 들게 하는가.
고민이다. 나는 절약을 즐길 만큼 돈을 좋아하는 인간이 아니다. 전형적인 소비형 인간이다. 그런데 아이가 커가는 요즘 번뇌가 심해졌다. 아무래도 수입은 정해져 있고 지출만 늘어나는 우리 집 경제 상황 때문일 것이다.
일단 꽃무늬 그릇을 내 눈앞에서 치워놓고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저들이 없어도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다면 진정한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것이고, 저들이 없는 생활이 불편하다면 난 그냥 새 그릇이 사고 싶지만 못 사는 가난한 주부가 되겠다. 요즘 유행하는 깔끔한 디자인의, 밥도 조금만 담을 수 있고, 티브이에도 종종 나오고, 인스타 사진빨도 아주 잘 받고, 2~3년 후에는 제발 깨지기를 바라게 될 그런 새 그릇이 갖고 싶은 주부일 뿐인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