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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 단상 2. 자발적 가난

by 고갱이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를 하지 않는 삶이 부끄럽지 않고 당당해지는데 미니멀리즘만큼 좋은 캐치프레이즈도 없다. 때문에 나를 포함한 미니멀리즘을 즐기는 일부 사람들은 가난을 허세로 포장한 것이 미니멀리즘이라는 비판적 시각을 외면해왔다. 우리의 가난이 세상에 당당 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종 미디어나 도서를 잠시만 들여다봐도, 진정한 미니멀리즘이란 어디까지나 자발적 가난을 뜻함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자발적 가난이란 스스로 원하는 가난한 삶, 빈곤을 놀이로서 즐기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소비를 문자 그대로 '즐기려면', 통장의 잔고 따위에는 무심해야 한다. 때문에 그들의 최소한에 대한 기준은 순수하게 가난한 자와는 많이 다르다.


머그컵을 예로 들어보자.

미니멀리스트는 꼭 필요한 물건만을 사용하되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예쁜 것, 오래 사용해도 싫증 나지 않는 것을 사서 쓰라 한다. 그래서 예쁘고 싫증 나지 않는 디자인의 머그컵을 사기 위해 다이소가 아닌, 백화점에 간다. 백화점은 웬만한 컵 하나 값이 3~4만 원 대이다. 세련되고 우아한 그림이 그려지거나 인체공학적으로 완벽하게 디자인된 손잡이가 달려있거나 입술에 닿기만 해도 입 안으로 감겨들어 올 듯한 부드러운 감촉의 컵 값은 두 배 혹은 세 배까지 뛰기도 한다. 금테를 두르고 있거나 화산재로 만들어져 식기세척기에 넣지도 못하는 컵은 제외하고라도, 3~4인 가족이 인당 하루 한 개의 컵을 사용할 수 있는 컵세트의 가격은 직장인의 한 달 대중 교통비를 훌쩍 넘을 것이다.


자발적 가난을 실행하는 미니멀리스트들은 코렐 머그컵 6개 세트 대신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디자인의 컵을 딱 한 개만 사기로 결심한다. 집에서 물, 커피, 맥주를 포함한 각종 음료를 마실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면, 5만 원 정도는 그다지 비싼 돈이 아니다. 게다가 이들은 아이가 없거나 혼자 사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 깨뜨릴 걱정도 없고, 컵도 정말 한두 개면 충분하기에 부담 없이 지불할 수 있다. 이들은 여러 개의 컵 사용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자아존중, 예를 들어 설거지라는 노동에서 벗어났을 때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 같은, 을 다른 곳에서 충족시킬 것이다. 공연을 관람한다던가, 여행을 떠난다던가, 유명 식당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던가.


반면 순수 가난한 자들은 5만 원짜리 컵을 사기도 어려울뿐더러 설사 큰 맘먹고 사더라 할지라도 음악회도 여행도 외식도 쉽게 하기 힘들다. 이들이 만약 미니멀리스트가 될 경우 머그컵 1개로 산다는 건 그냥 생활을 버티는 것일 뿐이다.


미니멀리즘에 대한 강박은 이들이 5천 원짜리 컵을 네댓 개 놔두고 기분에 따라, 날씨에 따라, 마시는 음료에 따라 바꿔가며 마실 수 있는 권리를 저지한다. 설거지를 미룰 수 있는 게으름을 날카롭게 처단한다. 낡은 선반이나 싱크대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곰팡이조차 감추지 못하게 한다. 컵은 한 개이면 충분하다는, 이 잔인하도록 단순한 미니멀리즘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소소한 감정조차 미니멀할 것을 강요한다. 날씨와 기온과 호르몬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당신의 기분, 민감한 체력 따위는 과감히 종량제 봉투에 담아 꽁꽁 묶어 버리세요!

미니멀리즘은 정말이지, 하늘이 지붕이요 땅이 이불이다 해야 끝날 것 같다.

3만 원짜리 머그컵을 쓰는 나는 이 중간쯤 위치하는 것 같다. 분명 넉넉하게 채워놓을 형편도 안되고, 이를 대신할만한 여가를 가볍게 즐기지는 못하는, 애매한 주부다. 한 때 미니멀리즘을 운운하며 자발적 가난을 시도해 본 적이 있다. 오랜 시간 시가에서 살다 나온 살림이었기에 신혼집과 다름없는 단출함이 있었고, 덕분에 눈독 들여놓은 부엌살림 몇 개쯤은 사도 괜찮을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새 것을 사는 대신 이 상태를 즐겨보기로 했다. SNS에 올라온 인테리어를 구경하거나 백화점 쇼윈도를 구경할 때 내 살림을 갓 시작한 30대 여자들이 흔히 갖는 부러움은 미니멀리즘이라는 핑계로 꾹 눌러 삼켰다. 이런 욕망 따위, 지나면 싫증 나는 한낱 인스턴트 기분전환에 불과하다고 나를 다독였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런 자기 제어가 덧없게 느껴진다. 머그컵을 1개 놓고 살 경우, 따라오는 것은 공간의 여유나 단출한 멋이 아니라 설거지라는 노동이었다. 아무리 두근거리네 어쩌네 하며 빈 벽에 컵 하나 달랑 두고 폼을 잡아봤자 커피 한번 마신 컵은 그냥 예쁘고 더러운 컵에 불과했다. 이 컵은 물, 우유, 주스, 술... 더 이상 아무 곳에도 사용하지 못하고 싱크대로 보내졌다. 식구가 고작 셋이지만, 반나절만 지나도 서너 개의 컵이 싱크대에 쌓인다. 새벽에 나가 한 시간이 넘도록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며 출근했다 퇴근한 남편이나 친구와 장난치느라 복도 바닥에 급식으로 나온 쌈장 통을 엎어버리고는 선생님께 혼나고 돌아온 초등학생 딸에게 네 컵은 네가 씻어라 잔소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니멀리즘은 주부인 나에게 기본 이상의 노동을 요구했다. 설거지를 바로바로 하지 않으면 얼떨결에 나만 게으른 주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당시 내 싱크대는 오래된 아파트의 낡은 전셋집의 것이었다. 컵 하나만 놓인 부엌을 봤을 때 단아한 기분이 들기 위해서는, 냄비가 눌어붙은 자국이 화상처럼 남아있는 하이그로시 부엌 전체를 리모델링해야 했다. 현실에서 드러난 미니멀리즘의 진실은 실로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사치스러운 놀이였다.

요리를 할 때마다 단벌의 조리도구는 계속 씻어가며 정신없이 사용해야 하고, 종류와 상관없이 모든 음식을 같은 접시에 담아 밥을 먹는다. 단벌의 옷이기에 매일 세탁을 하고, 빨리 마르지 않으면 불안하다. 365일 4계절 내내 늘 같은 쿠션이 놓여있는 소파에 눕는다. 그렇다고 1년에 단 한두 번이라도, 대단히 세련된 인테리어가 되어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대단히 화려한 접시에 담긴 대단히 유니크한 요리를 맛보며 삶의 질을 운운할 수도 없다. 가끔 TV나 주변인들의 SNS를 보고 한 번씩 이런 곳을 검색해보는 나를 들여다보면 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이 나란 존재의 자아존중인지 당장 다음 달 대출 이자와 아이의 학원비인지. 그래서 이 레스토랑의 별점이 궁금한 건지 아니면 음식 가격이 궁금한 건지. 이런 나에게 미니멀리즘은 그저 엉덩이 붙이고 앉을 틈도 없이 발발거리고 종종거리게 만들 뿐인 작금의 허세였다. 한 집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주부로서 결국 전시대의 폐습을 따라 살며 각종 관절염과 우울증 유전자 같은 것들을 발현시키라는 명령이었다. 결국, 나는 집안 살림을 사는 데에 하루 24시간 설거지와 청소에 열과 성의를 다하고 더불어 순간순간 명상과 심호흡을 통해 인격 수양을 하지 않는 이상, 미니멀리즘은 실행하기 힘든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생각을 바꾸니 필요한 것이 많아졌다. 설거지를 하루에 한 번만 하려면 컵 6개로는 부족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신 컵에 점심 커피를 마시고, 가끔은 밀크티까지 마시는 등 재활용을 한다 해도 부족했다. 컵을 두 개 더 샀다. 3만 원도 5천 원도 아닌, 애매한 가격 8,700원이었다. 40% 할인가였다. 믹싱볼도 샀다. 스탠 볼 한 개를 놓고 쓰면서 쌀도 씻고 야채도 씻고, 고기 양념도 하고, 쿠키와 부침개 반죽도 하고, 비빔국수도 했다. 애초에 쌀 씻는 용으로 나온 볼이라 올록볼록 엠보싱이 있어서 틈에 낀 반죽과 양념 설거지하기 불편했다. 민자형 믹싱볼 3개 세트가 70% 세일을 했다.

남편은 뭘 그렇게 샀냐 한다. 지금껏 없이 잘 살았으니 '있으면 좋을' 물건은 굳이 살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건은 그다지 없다. 생활을 생존으로 바꾸면, 인간은 불 피울 부싯돌과 몸을 가릴 약간의 천만 있어도 산다. 단 한 개의 컵으로도 식구 셋이 하루 종일 물과 커피와 술을 마실 수 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렇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전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내가 치르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치른다. 물 컵 한 개로 살 경우 돈과 공간의 낭비는 줄겠지만, 집에 머무는 시간이 가장 많은 주부의 노동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 집안일만 하고 살기 싫어서, 좀 샀다... 고 이렇게 길게 말하지는 않았다.

미니멀리즘은 보여주기의 또 다른 방식에 불과한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단순함과 정 반대로 개인의 일상 에너지를 무한대로 소비할 것을 요구해대는 것이 뻔뻔하기 짝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것은 그냥 가난한 것이고, 가난한 자는 그냥 알뜰하게 생활하면 된다. 미니멀리즘으로 포장할 필요 없다. 더 피곤해진다. 우리의 삶의 만족은 깨끗하게 인테리어가 완성된 집과 그 안을 단출하게 꾸며놓은 살림살이, 틈틈이 보이는 고급 카페나 휴양지 사진에서 얻을 수 없다. 통장에 조금씩 늘어나는 잔고와 지난달보다 줄어든 카드 청구서가 더 절실하다. 개수대에 설거지거리가 한가득 쌓여있는 부엌일지라도, 한 걸음 더 나아가 비록 내가 전업주부일지라도, 컵 하나를 하루에도 몇 번씩 씻어야 하는 깨끗한 집 대신 편하게 쉴 수 있는 집에서 산다면, 다시 말해 정서적 맥시멀 리스트가 된다면, 훨씬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미니멀리즘은 정말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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