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조금 있음
톨스토이는 중학생 때 어쩌면 가장 처음 접한 외국 작가이다.
너무나도 유명했기 때문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읽던 책이었기에 가장 먼저 그 책을 집어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디서 그 책을 빌렸는지 이제 도저히 기억이 안나지만, 확실히 기억나는건 그 당시의 나는 톨스토이를 문자 그대로 읽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서양의 유명한 고전인문은 죄다 기독교의 신과 나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고대 그리스 철학은 그렇지 않았지만 근대의 철학자들은 그 색깔이 짙었다.
무교의 집안으로 태어나서 더욱이 가장 가까웠던 것은 불교를 비롯한 토속신앙의 잔재였기 때문에, 나에게 그 서양의 위대하다고 평가받은 이야기들은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삶의 방향이 그렇듯 내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고 있을 때 나 또한 기독교의 신을 접하게 되었고, 그 당시에는 성경을 많이 읽었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지켜보았다. 그런 배경이 있었던 터였을까, 오늘 읽었던 25선 중에서 5선(책의 3분의 1 이상을 읽었는데 고작 5선이라니)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빈 북"
"세 그루의 사과나무"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두 순례자"
이상 5선의 이야기는 정말로 내가 하나님의 시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이야기였다.
순례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에도,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지를 읽을 때에도, 세 그루의 사과나무가 자라는 것을 지켜볼 때에도, 북을 찢을 때에도, 할멈이 아이를 꾸중을 줄 때에도, 어릴적에는 이 책들의 교훈이 인간으로 하여금 지혜를 가져다 주기 위함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이야기들을 지금의 내가 해석하였을 때는 성격의 구절 및 이야기, 그리고 예수를 다시 묘사 및 표현하는데 지나지 않았고, 깊게 믿고 있는 신자라면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뒤에 바보 이반도 그렇듯, 신약의 예수의 이야기를 다시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고뇌나, 하다못해 성경 구절에 대한 깊은 고뇌는 보이지 않는다.
어릴 적에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읽었고, 그에 감동받아 브리다, 11분, 흐르는 강물처럼 여러 작품을 읽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화두를 던지기만 할 뿐 그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은 부재함을 발견했다. 물론 문체나 작품의 분위기는 아름다웠지만, 지금의 나로써는 예쁜 쓰레기보다 못난 보석이 필요하였기에, 이, 한때 내가 정말 사랑했던, 톨스토이의 책은 안타깝게도 파울로 코엘료의 책처럼 아무것도 배움과 가르침을 구할 께 없었다.
중세 이후의 모든 철학서와 고전인문이 이런 결과를 자아내지는 않는다. 그중 러시아 문학에서도 도스토옢스키의 일부 책이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처럼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책도 있다. 다만 이번 톨스토이의 책을 통해서 앞으로는 기독교의 색채가 강한 작품일수록 읽지 않아도 됨을 확신했다.
지금은 바보 이반을 읽다가 책을 덮었다. 아마도 조금은 인본주의의 책을 다시 읽고 다시금 이 책을 마주해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