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도시남녀

-소설 -

by 방정민

1.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더운 여름, 이 계절에도 외로운 건 무엇 때문일까. 101호 남자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또 아무 곳에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예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네. 안녕하세요. … 날씨 무척 덥죠?”

처음에 말을 더듬는 101호 남자, 이런 전화 경험이 많지만 아무리 많이 해도 이런 전화에는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러자 상대편 여자가 주도권을 잡고 말을 이어간다. 이런 전화에 꽤 익숙한 그녀다. 통화를 오래 해야 그녀에게 조금의 돈이라도 더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직업은 한국자본주의에서 여자가 선택하기에 딱 좋은 업종이다. 남자의 외로움을 달래주며 말상대가 되어주는 전화서비스 일을 하기도 하고 동시에 돈 많은 남자들로부터 돈을 받고 그들의 비밀스런 애인이 되어주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스폰서 일을 하고 있다.

“바캉스는 다녀왔어요? 우리나라는 여름휴가를 7월 말에서 8월 초에 모두 다녀오잖아요. 전국민의 휴가철인데 휴가 다녀오셨어요?”

“아뇨. 아직.”

“같이 갈 여자가 없는 거예요?”

“네…”

“그래서 지금 외로운 거예요? 실은 저도 혼자에요. 근데 이 더운 여름에 왜 이리 외로운지. 단지 바캉스 같이 갈 애인이 없어서는 아닌 것 같아요. 뭐랄까…”

“저랑 생각이 같네요. 외로움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생기는 것 같아요. 그냥 한 번씩 막 밀려오는… 존재 그 자체라고나 할까. 외롭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와, 말씀 잘 하신다. 그런 것 같아요. 계절이나 사람과 상관없이 어쩔 땐 막 외로워지죠. 근데 휴가 간다면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글쎄요? 같이 가실래요?”

“네? … 우리는 전화통화만 해야 하는 사이인데… 음, 인연이 있으면 만나겠죠. 그때 같이 가요. 히히.”

그녀는 아주 능숙하게 그의 말을 받아주며 슬쩍 넘긴다.

‘쿵쾅 쿵쾅. 끼리리릭.’

옆방이 또 시끄럽다. 짜증이 난 101호 남자는 자신의 방 벽을 있는 힘껏 내려친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다. 101호와 104호는 서로 붙어 있는 옆방이다. 가정집을 원룸으로 고쳐 임대한 집에서 세 들어 살고 있다. 정식 오피스텔이나 원룸에서 살 형편이 못된 사람들이 이런 집에서 주로 살고 있다. 이 동네는 오래된 맨션과 2층집들이 많은 중간 달동네다. 2층 집들 중 일부는 집을 원룸으로 개조해 임대하고 있다. 집주인은 주로 2층에서 살며 1층 방들을 원룸으로 개조해 월세나 받아먹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판잣집 같은 고시원보다는 낫다. 베니어판 같은 벽으로 된, 마치 닭장 같은 고시원에서 살 때를 생각하면 101호는 신분상승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것이 올챙이 때를 생각 못하는 법, 101호는 처음 여기 입주할 때의 기쁨과 환호는 완전 잊어버리고 서서히 이곳의 삶이 짜증나기 시작했다. 특히 옆방 104호에서 들려오는 각종 소음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뭘 하는지 밤낮을 안 가리고 쿵쾅 쿵쾅 시끄럽다. 또한 가끔씩 들려오는 여자의 교성에 그의 기분은 더러워져 있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교성은 이상하다. 101호 자신이 하는 섹스도 아닌데 처음엔 묘하게 흥분되고 가슴이 막 떨려온다. 그러다 그 소리가 절정을 치달을 때쯤 그의 가슴은 거의 멈춰버린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동시에 자신의 아랫도리도 젖어버리고 만다. 아랫도리가 축축함을 깨닫는 순간 흥분을 막 지나 불규칙하게 뛰는 가슴과는 반대로 그의 기분은 굉장히 더럽다. 지저분하고 너저분한 이 기분, 더욱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비애감마저 든다. 그리고 외로워진다. 외로움은 이런 데서도 생기는 모양이다.

101호는 형식적으로는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고시생이다. 그러나 3년 동안 합격하지 못하자 사실상 포기했고 지금은 말로만 고시생이다. 공부에 손 놓은 지 1년이 넘었다. 이 말은 가족과 연락이 끊긴 시간과 같다는 말이다. 마트에서 일용직으로, 또는 인력시장에서 일하면서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고 있다. 이제 서른. 서른의 나이에서 하루살이 인생이 될 것이라고 그는 상상도 못했다.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최저임금 밑바닥 인생, 알바 인생, 이것이 그가 서른에 단 훈장과도 같은 이름이다. 그도 대학생 때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인문학을 전공한 죄로 그가 사회에 나갈 곳은 없었다. 이공계기피가 사회문제라 하지만 이공계는 그나마 나았다. 인문학은 공룡신세다. 인문학 전공자들이 사회에 진출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기성세대와 사회의 직무유기와 다를 바 없지만 그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인문학 전공자들은 어쩔 수 없이 공무원 시험에 뛰어든다. 합격하면 다행이고 떨어지면 말 그대로 인생 종친다. 가족과도 멀어진다. 인생 바로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희망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희망은 그것을 품을 수 있는 자들만의 것이었다. 사회가, 국가가 희망을 선택적으로 주고 있었다.


2.


‘딩동딩동’

누군가 101호 문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 이 밤에 초인종을 두드릴 사람은 주인 밖에 없다. 또 무슨 문제로 사람을 괴롭히려나 싶어 나가고 싶지 않지만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세요?”

주인아주머니다. 전기세, 수도세는 얼마 전에 냈는데 또 무슨 문젠가 싶었다. 주인아줌마가 좋은 일로 세 들어 사는 그를 찾아오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쓰레기는 그 표에 있는 대로 철저하게 분리수거하여 제 날짜에 내 놓아야 한다고 했잖아.”

벽에 붙어 있는 표를 가리키며 쓰레기 분리수거 하지 않았다고 또 난리다. 101호는 아무리 표를 봐도 헷갈릴 뿐이다. ‘무슨 분리수거가 이리 복잡해. 가연성 쓰레기, 생활쓰레기 이렇게 표기해놓으면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건지…’ 101호는 확 짜증이 몰려왔다.

“죄송한데요, 저도 분리수거 잘 하려고 합니다. 근데, 자 보세요. 이 쓰레기는 가연성 쓰레기입니까? 생활쓰레기입니까? 이런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왜 만날 저만 가지고 그럽니까? 내가 내놓은 쓰레기들 보니까 나보다 더 엉망으로 분리수거한 사람들도 있던데…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입니까?”

“다른 방 사람들은 지금 없으니까 그렇지. 이 쓰레기봉투 총각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요.”

괜히 머쓱한 듯 주인아줌마는 알았으니 ‘아무튼 분리수거 잘 하라’고 말하곤 2층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

주인을 본 날이면 괜히 짜증이 난다. 세입자의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고약한 주인하고는 상종하고 싶지도 않다. 하기야 이 집에서 1년 넘게 살면서 주인 얼굴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그였다. 한 번씩 괴롭히기는 하지만 주인아줌마가 내려오니까 얼굴을 아는 것이지 그 외 사람들 얼굴은 전혀 모른다. 여기는 자기 얼굴을 감추고 절대 사람과 대면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웃 간의 정은커녕 서로 알아선 안 된다. 이웃사람이 더 무서운 세상이니까. 누구의 탓도 아니다. 사회가 그런 것을. 세상인심이 그런 것을.

‘야옹 야옹’

또 밤이다. 밤마다 길고양이들이 울어댄다. 배고프다고 울어대는지, 외롭다고 울어대는지 이것들이 잘 시간에 나타나 밤마다 울어대는 통에 잠을 푹 잘 수가 없다. 옆방 104호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 있는데다 주인아줌마까지 짜증나게 해서 감정이 부글부글 끊고 있던 차에 이놈의 길고양이들이 울어대고 있는 것이다.

‘저것들 확 잡아먹어버리든지… 저 놈의 도둑고양이들.’

참다못해 고양이들을 쫓아내려고 밖을 나갔다. 그런데 광경이 가관이다. 이놈의 고양이들이 사람처럼 앉아서 사람들이 내놓은 음식쓰레기 뚜껑을 열어 고픈 배를 채우고 있었다. 순간 차마 쫓을 수가 없었다. 냄새는 악취로 진동하고 있었지만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 놈들이 저렇게까지 해서 배를 채우려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고양이들을 쫓을 수가 없었다. 문득 101호는 자신을 보는 듯 고양이들이 가여워졌다. 그런데 이 고양이들이 사람 마음을 읽었는지 도망가려다 말고 그대로 앉아 인간의 음식쓰레기를 해치우고 있었다. 아주 맛있게. 입가에 더러운 인간의 음씩 찌꺼기를 묻혀가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오던 101호는 갑자기 104호방이 궁금해졌다. 뭐 하는 사람인지 방에 없을 때는 보름이상 비우는가 하면 있을 때는 밤낮을 안 가리고 무슨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104호 방이 궁금해졌다. 104호 방으로 다가가 창문을 통해 그의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들여다보려고만 했다. 여름이라 창문이 열려있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104호 방은 꽤 넓었다. 그의 작은 방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순간 ‘아무리 커도 그렇지 차도 있는 놈이 왜 이런 방에서 살고 있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사람이라는 느낌만 들었다. 어쨌든 이리 저리 얼굴을 돌려가며 그의 방을 훑어보고 있는데 순간, 집 앞에서 주차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101호는 얼른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101호는 직감으로 104호 남자임을 알아차렸다. ‘휴, 큰일 날 뻔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01호는 자기 방 대문을 살짝 열어 104호가 들어가는 것을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눈으로 봐도 여성스럽고 섹시한 30대 초쯤으로 보이는 여자와 함께 들어가는 것이었다. 101호는 순간 느낌이 왔다. ‘어 저것들이. 또 그 짓을 하려고… 내가 오늘은 안 참는다.’ 속으로 되 뇌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벼르고 있었다. ‘어떻게 저것들을 골탕 먹이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101호는 104호와 맞닿아 있는 자신의 방 벽에 귀를 갖다 대었다. 짜증난다고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소리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는지, 이런 자기의 모습이 참 한심스럽기도 하고 우스워 보이기도 하였다. 한참이 지났다. 그런데 101호의 예상대로 여자의 신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조금 늦게 시작하려나.’했는데 여자의 교성 대신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다. 104호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악, 도 도둑이야! 도둑이야!”

한 여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고함을 질렀다. 103호 여자였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놀란 가슴을 쓰다듬으며 소리 질렀다. 그러자 주위는 순식간에 웅성웅성 시끄러워졌다. 도둑이 103호 방범창을 자르고 침입하자 자고 있던 103호 여자가 놀라 소리를 지른 것이다. 이집 저집에서 사람들이 나와 주위는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2층 주인이 뒤늦게 나왔다. 103호 여자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101호, 102호, 104호 모두를 불러 모았다. 잃어버린 것 없냐는 것이었다. 101호는 공부하다 나오는 척하며 자신은 아무 피해 없다고 했다. 도둑이 이집 저집을 동시에 털고 도망갔다는 것이다. 혼자 사는 여자들은 무서워 죽겠다고 난리 아닌 난리를 피웠다. CCTV를 설치하지 않아 도둑이 설친다고 하면서 주인에게 CCTV를 설치해 달라고 강력 제안했지만 주인은 이런 동네에 무슨 CCTV냐고,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며 그러려면 월세를 더 내야 하니 그냥 살라며 오히려 짜증이다. 잠시 후 경찰이 오고 갔고 이 곳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거나 이 동네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그 빤한 말만 하고는 별다른 조치 없이 철수했다.

그래도 도둑 덕분에 이 집의 세입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누가 사는지 대충 감으로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 정확히는 알지 못했는데 이번 사건으로 101호, 102호, 103호, 104호는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놀라셨죠?”

먼저 104호 남자가 말을 건넸다.

“네. 저는 딸과 함께 사는데 너무 무서워요. 남자가 이럴 땐 있어야 한다니까요.”

103호 여자가 말을 받았다.

“그렇죠. 근데 다친 데는 없으시죠?

“네. 눈을 마주쳤는데 너무 무서워서… 아직도 가슴이 떨려요.”

“진정하세요. 심호흡 한 번 크게 하시고 좋았던 일, 유쾌했었던 일을 기억해보세요.”

103호 여자가 잠시 따라 해보더니

“이제 조금 괜찮네요. 고맙습니다. 역시 남자라서 다르네요.”

“뭘요. 도움이 됐다니 제가 더 고마운걸요. 하하. 그런데 실례지만 뭐 하시는 분이세요?”

“예비소설가예요. 먹고 살려고 대필작가 일도 하구요. 그런데 그쪽은요?”

“전 사진작가입니다. 작은 출판사도 경영하구요.”

“아, 그러세요. 저도 사진에 관심 많은데… 언젠간 저도 제 책을 낼 건데 그땐 사장님 출판사에서 내면 되겠네요. 잘 봐 주세요.”

그녀는 흰 이를 드러내며 금방 환하게 웃는다. 언제 도둑사건을 당했는지 그 일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특유의 중년여자답게 남자를 살살 잘도 녹인다. 둘은 중년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넉살도 좋게 금방 친해졌다. 중년이란 이런 나이인가보다, 101호는 생각했다. 그런데 102호 여자의 모습이 이상하다. 자기 방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너무 무덤덤하고 남의 일처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101호는 받았다. 입고 있는 옷도 집에서 있다가 나온 차림이 아니었다. 화려한 외출복이었다.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101호는 용기 내어 103호 여자에게 말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그쪽은 이상없으세요?”

“네. 저는 도둑 던지도 몰랐어요. 앞으로 조심해야겠네요. 저도 혼자 사는데.”

“그러세요?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이웃인데 돕고 살아야죠.”

101호는 왠지 102호 여자에게 관심이 간다. 그녀의 목소리는 상냥하고 여성스러웠다. 얼굴도 목소리만큼이나 예뻤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워낙 여성스러워서 그런가 하고 101호는 생각해버렸다.

도둑사건을 계기로 철저히 닫혀있던 도시의 남녀들은 서로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도둑이 도시인의 단절을 풀어주었다. 무미건조한 도시 생활에 활력을 심어준 것이다. 그런데 이 활력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한 번 풀린 도시 남녀들의 마음의 문은 걷잡을 수 없었다. 친함은 언제나 상처가 오고가는 법, 마음을 준다는 것은 곧 상처를 받는다는 것임을 알면서도 도시인들은 언제나 마음을 줄 수도, 안 줄 수도 없는 아이러니 속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저 도시의 삶은 항상 상처투성일 뿐이었다.

이상하게 도둑 사건 이후 101호와 102호는 자주 마주쳤다. 사실 자주 마주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때부터 경계를 풀고 서로의 존재를 인지해서일 것이다. 아무튼 101호와 102호는 서로 인사를 하면서 안부를 묻기도 하고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101호가 102호에게 책 선물을 하면서 둘은 더욱 가까워졌다. 나이는 102호가 한 두 살 많았지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머, 요즘에도 책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 계시네요. 저 책 좋아하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책 좋아하세요? 요즘 사람들 살기 바빠서 그런지 책을 통 안 읽는데.”

“저는 책 읽기 좋아해요. 혼자 있으면서 할 일도 없고 심심하면 음악 틀어놓고 책 봐요. 제가 요즘 사람 같지 않게 취미가 독서랍니다. 하하.”

그녀는 마치 선녀처럼 웃었다. 이런 여자를 왜 아직 알아보지 못했는지 101호는 자신을 책망했다. 속으로 꼭 이 여자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작업을 걸었다.

“혹시 술 하실 줄 아세요? 시간 나면 언제 술 한 잔 해요. 아니면 커피라도.”

“저한테 작업 거시는 거예요? 그러다 다치실 텐데…”

그녀는 방긋 웃었다. 그녀의 말솜씨와 외모에 101호는 넋을 점차 잃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101호에게 마음을 다 주지 않았다. 줄 듯 말듯 하면서 그를 애태웠다. 꼭 그녀 자신의 직업과 처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랑을 하는데, 마음을 주는 데 그녀는 아주 능숙했다. 감정 컨트롤, 관계 컨트롤에 그녀는 뛰어났다. 인생을 일찍 안 때문일까, 아니면 진화심리학에서 말하는, 본능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감정 컨트롤에 뛰어나기 때문일까. 강한 남자를 최종적으로 선택하기 위한 여자들의 본능이 감정 조절을 마음대로 가능하게 하고 관계의 천재로 만들었다는 진화심리학이 맞다면 많은 남자를 섭렵하는 102호는 전혀 나쁜 여자가 아니다. 오히려 본능에 충실한 그녀는 아주 훌륭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녀 역시 최종적인 승리자는 아니었다.

아무튼 102호 여자는 101호 남자보다 감정컨트롤과 관계 면에서 분명 한 수 위였다. 둘은 술을 마시고 모텔에서 하루를 보냈다. 각자의 방 두 개를 두고 굳이 모텔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섹스가 끝나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우리 섹스파트너만 하기로 해요. 애인하면 결국 둘 다 다칠 거예요.”

“왜 내가 싫어요? 아니면 다른 남자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내가 한 살이라도 더 먹어서 아는데 관계가, 사이가 깊어지면 마음 다쳐요. 그러면 아프고… 이젠 다치기도 싫고 아프기도 싫어요. 우리 관계 가볍게 해요. 그래야 안 다쳐요.”

그녀의 눈가가 슬프다. 이런 말을 하는 그녀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101호는 답이 없었다. 인생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에서 자신 같은 일용직 알바생이나 수험생의 인생은 슬픔 자체임을 잘 알고 있었다. 밑바닥 인생은 그 사랑도, 관계도 아플 수밖에 없음을 101호는 처절히 깨닫고 있었다. ‘어떤 인생이든 아픔이 없겠느냐’하는 ‘인생이 아픔’이라는 말은 자신에겐 사치일 뿐이었다. 자본주의에서 밑바닥 인생은 좌절 그 자체였다. 사회구조적, 현실적 좌절에서 빚어지는 인생의 아픔은 본질적 인생의 아픔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3.


“선생님은 참 이상한 분이세요.”

“뭐가 말입니까?”
“보통 사람 같지 않은 게… 아주 독특하세요. 결혼도 안 하셨고 아이도 없고 거기다가 자유롭게 사시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는 것도 그렇고. 그 작업이란 것도… 처음엔 좀 끔찍했어요. 변태 아닌가 하구요. 히히.”

“자유, 그건 제가 원하는 거지만 때론 굉장히 외로운 겁니다. 제 작업을 이해하시는 분을 만나서 저도 반갑습니다. 근데 보통 사람과 많이 달라서 싫어요?”

“아뇨. 그 반대에요. 그래서 선생님이 좋은 걸요. 하하.”

이미 103호와 104호는 급속도로 친해져있었다. 103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104호 방을 들락거렸고 둘은 연인 아닌 연인이 되어 있었다. ‘모든 연인은 섹스파트너’라는 명제에 의하면 둘은 몸을 나누는 사이이기 때문에 연인이 분명했다. 둘은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고 서로에게 부담주지 않는 연인-이런 연인이 현실에서 존재할지 모르겠지만 -바로 현대판 연인인 섹스파트너인 것이다. 그런데 놀랄 일은 104호가 103호의 딸과도 친하다는 사실이다.

사진작가라는 타이틀과 출판사 사장이라는 것이 이 두 여자에겐 큰 백처럼 여겨진 모양이다. 유명한 사진작가도 아니었고 1인 출판사 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3호와 그녀의 딸은 104호를 무슨 구세주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때가 되면 103호에게 등단시켜주고 책을 출간해주겠다는 말이, 아무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그녀의 딸에겐 프로필 사진을 찍어 모델로 데뷔할 수 있게 힘써 보겠다는 말이 이 모녀에겐 무슨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그것이 아니면 모녀는 104호를 공동의 먹잇감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찾아온 먹잇감 일단 저장해서 조금씩 먹어보자는 속셈이었는지도…

어린 나이 아무 것도 몰랐을 때 결혼하여 채 몇 년 살지 않고 이혼한 103호와 그녀의 딸은 세상 살아가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의 거침과 비루함을 너무 잘 알아서 썩은 동아줄이든 아니든 그냥 아무에게나 자신들을 맡기고 싶었던 것일까. 모녀는 동시에 104호에게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의탁했다.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이 남자를 요리하는 법이라,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공동빨래터도 좁아터질 지경이다. 이런 집에 뭐가 안 그렇겠냐마는 빨래가 한꺼번에 널리는 날이면 정말 구경할 만하다. 색깔이며 옷 종류며 누가 어떤 옷을 입는지 여실히 다 들어나기 때문이다. 자신의 속을 다 보여주고 싶은 내면의 탈출구랄까. 공동빨래터에 널려 있는 옷들을 보고 있으면 야릇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여자의 속옷이 걸리기 시작했다. 서로 친해진 탓일까. 102호 아니면 103호라는 소리인데, 잘 보면 성인 여성의 속옷 같지는 않다. 하기야 요즘에는 성인 여성들도 사춘기 소녀처럼 유치하지만 사랑스럽고 재미있는 속옷을 입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102호나 103호의 속옷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103호 딸의 속옷인가. 요즘은 아가씨가 더 아줌마 같은 세상이니…

어느 날부터 공동빨래터에서 여자 속옷이 하나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103호 딸이 빨래를 걷으려고 나와서 보인 반응이 더 의외였다.

“어, 내 속옷이 또 없어졌잖아. 아저씨가 가져간 모양이네.”

자기 속옷이 없어진 것에 대해 너무나 태연했고 남자가 가져갔다는 것에 대해서도 당연한 듯한 행동을 보였다. 그러고는 104호 방으로 갔다.

“아저씨! 사진 잘 나와요?”

“글쎄. 한 번 봐봐. 이번 팬티와 지난 번 브래지어를 이렇게 바꿔놓으니까 좀 괜찮은 것 같은데, 어때?”

“음. 좋네요.”

“그 보다 더 좋은 걸 보여주지.”

104호는 레드와인을 따더니 갑자기 한쪽 벽에 설치해놓은 103호 딸 속옷에 뿌렸다.

“어때?”

“와! 아주 좋아요. 정말 아저씬 대단한 작가세요. 제 몸도 이렇게 잘 찍어주실 거죠?”

“그건 니 엄마가 허락해야지.”

“엄마 허락 받을 나이 아니에요. 저도 이제 20살인 걸요.”

“그래도 엄마가 아시면 날 가만 안 둘 걸. … 어쨌든 우리 와인이나 한잔 할까?”

“좋아요.”

둘은 레드와인을 마셨다. 외로움을 즐기는 자들이 레드와인을 마신다는 말은 정말 터무니없다. 외로움을 즐기는 자들이 아니라 몸을 원하는 자들이, 사랑을 즐기는 자들이 레드와인을 주로 마신다. 최소한 104호와 103호, 그리고 그녀의 딸에겐 그랬다. 104호는 와인을 마셔가면서 103호 딸의 몸을 찍어댔고 가냘픈 그녀의 몸을 자기 몸으로 빨아들였다. 마치 와인을 빨아들이듯이. 스물 살짜리 여인의 피는 와인보다 짜릿했고 강렬했다. 몸이야, 몸을 구성하고 있는 피부야 단순한 촉각에 불과했다. 껍데기에 불과한 피부를, 몸을 찍는 진짜 이유는 몸속에 있는 피를 맛보기 위해서였다. 104호에게 사진은 허물뿐인 몸을 찍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몸속에 펄펄 끓고 있는 여인들의 피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 피를 표현하기 위해 그는 수많은 여인들을 경험하였고 그녀들의 피를 맛보았다. 그는 그가 맛본 여인들의 피를 그녀들이 입은 속옷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에게 여성의 속옷은 다른 이름의 생명이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적나라하면서 강렬하게 느끼게 하는 또 다른 생명체였다.

기괴한 사진작가, 그러나 이런 그의 모습에 많은 여자들이 빨려들어 왔다.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태초의 생명체처럼.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필수불가결하게 진화하는 생명체의 본능 같아 보였다. 여성의 본능처럼…


4.

‘오늘 마감 뉴스입니다. 세계경제의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나라 5대 재벌의 이익은 올해 3/4 분기에 사상 최고를 달성했습니다. ( )전자의 분기 영업이익은 7조에 달해 사상 최대를 기록했는데요, 이에 따라 ( )전자는 직원 여름 휴가비로 일인당 최대 500만원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 )전자는 휴가비를 정규직에만 지급하기로 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소기업의 이익은 작년 대비 더 떨어졌고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더욱 심화돼 국민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재벌그룹의 고용 비중은 전체 고용의 2.1%에 불과해 재벌의 실적이 국민경제나 서민경제에 별 도움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내일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다시 여성 혼자 있는 집에 들어가 성폭행을 저지를 일명 발발이 사건이 터지겠습니다. 범인은 ○ 일대 혼자 사는 여성의 방에 방범창을 뜯다 되지 않자 대담하게 방문으로 들어가 여성을 위협하고 성폭행을 저지르겠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범인은 같은 집에 사는 남성이라는 사실인데요, 옆방에 사는 여성을 성폭행한 후 다른 옆방 남자를 살해할 것입니다. 범인은 가면을 쓰고 범행을 저지르겠는데 경찰은 원한이나 치정관계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할 것입니다. ○ 일대는 다세대주택이나 오래된 주택이 많은 지역인데, 대표적인 중간 달동네로 혼자 사는 여성이 많은 곳입니다.’

뉴스도 철저히 오늘뉴스와 내일뉴스로 나뉘어져 있다. 잘나가는 정규직이나 상류층은 언제나 흥이 나는 오늘뉴스의 대상이다. 그러나 101호 같은 비정규직이나 하층민에겐 불길하고 지옥 같은 내일뉴스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습한 암흑인생이 혀를 날름거리며 그들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한번 나쁜 뉴스의 주인공이 되고 나면 좀처럼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빠져들어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리는 늪처럼. 차라리 나쁜 뉴스의 주인공이라도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대다수의 사람에게 현실은 그랬다.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101호는 포기는 했다지만 그래도 미련은 남았는지 형식적으로 쳐본 공무원시험에 또 떨어졌다.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포장마차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조금 밖에 안 마셨는데 금방 취했다. 그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듣지 못한 외로움을 달래주는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볼일이 생겼다며 미안하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러면 전화를 받지 말든지 내 돈만 나갔잖아.’ 101호는 ‘이런 여자에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하며 스스로 자책했다.

그래도 뭔가 마음이 허하고 아쉬워 이번엔 102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오늘 정말 엿 같은 날이군. 일부러 날 피하나…’ 괜한 자격지심이 들었다. 더 취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옆방에서 다시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피부와 여자의 살갗이 맞닿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면서 동시에 ‘좋아죽겠다’는 최고조의 환희 섞인 여성의 신음소리 ‘아, 아…’가 연발탄으로 날아와 그의 너덜너덜해진 가슴을 관통했다. 101호는 폭발할 것 같았다. ‘에이 썅…’하며 아무리 벽을 쳐도 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의 소리는 더욱 격해졌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한 대 피고도 참을 수가 없든지 104호 방으로 갔다. 따질 셈이었다. 그런데 순간 104호 방에서 누군가 나오는 것이었다. 얼른 몸을 숨겼다. 몸을 숨겨 살짝 훔쳐보았다. 충격이었다. 102호였다. 101호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그녀가…’허탈한 마음과 배신당한 마음 등등이 교차하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배신도 아니고 허탈할 일도 아닌데 당시 101호에겐 그랬다. ‘가만, 옛날부터 이상하다 했는데…’ 102호 목소리는 좀 전에 전화 속 여자의 목소리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101호는 정말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울분할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101호는 격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동네 한 바퀴를 달렸다. 그래도 참을 수가 없었던 101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뭔가를 뒤집어쓰고는 102호 방으로 갔다. 102호 방에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가 자기를 기다린 것이다. 방범창의 약한 부분을 잘 알고 있던 그는 그쪽을 뜯으려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방범창도 꽤 많이 뜯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방문이 정확히 닫혀있지도 않았다. 방문을 열어보았다. 열렸다. 그는 방문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상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는데 꼭 야하다고 할 수는 없는…. 순간 그는 ‘미친년’하며 들어온 목적을 잊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알몸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은 다시 격해졌고 순간적으로 그는 짐승으로 변해버렸다.

그녀를 성폭행했다. 정확히 말하면 하려다 말았는데 성폭행 미수라고 해야 할까. 그녀를 성폭행하려는데 그녀는 어떤 거부반응도 없이 마치 실성한 여자처럼 누워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눈 초점은 흐려져 있었고 그런 눈에는 세상에 대한 원망조차 없었다. 이런 그녀를 보자 차마 성폭행을 할 수 없었다. 성폭행을 할 느낌이 나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성폭행을 할 마음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어서 그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성폭행미수범나 성폭행범이나 다를 것은 법률적인 것일 뿐, 그는 이미 짐승이 됐었다. 인간이하의 성폭행범이 되려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는 얼른 그의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이불로 감싸주고는 그녀의 방을 나왔다. 밖을 나와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제정신이 들자 그는 생각했다. 정상적이지 않은 남녀의 몸대화는 그저 짐승의 행위에 불과하다고. 하기야 정상적인 남녀의 몸대화가 얼마나 있겠냐마는, 어쨌든 사랑하지 않는 남녀의 섹스는 정말 끔찍했다. 한 마디로 기분 정말 더러웠다. 짐승의 몸부림, 흐느낌의 몸부림, 배출의 몸부림일 뿐인 섹스, 이 몸대화에 모두 미쳐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몸은 그 의미가 조금 달랐다. 그녀의 몸은 곧 돈이었다. 사랑도 꿈도 아니었다. 철저히 돈이었고 현실이었고 생존이었다. 몸을 팔아, 웃음을 팔아 돈을 버는 그녀에게 몸은 그저 돈벌이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몸이 돈벌이로 전락하는 순간 그녀의 삶이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해졌다. 돈을 벌기 위한 섹스이건 당하는 성폭행이건 똑같은 몸이었다. 몸은 다시 일으켜 세워 치장하면 아름다워지지만 삶은 그렇지 않았다. 향기 나는 몸을 이용해 돈을 벌수록 그녀의 삶은 더러운 냄새로 채워졌다.

101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무슨 짓을 하려했는지 깨달았지만 쉽사리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미수건 아니건 자신이 파렴치 범인이 된 것을 안 순간 더 대담해졌다. 이 일이 모두 104호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참을 수가 없었다. 바로 104호 방으로 쳐들어갔다. 방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도둑고양이마냥 슬그머니 방안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이 없다. 104호는 없었다. ‘그 사이 어딜 갔지? 문을 안 잠그고 나갔으면 멀리 간 게 아닌데.’ 101호는 어느새 침작해져 있었다. 거실은 없었지만 방은 두 개나 되었다. ‘차도 있고 꽤 사는 것 같은데, 그런 놈이 왜 이런 집에 사는 거야.’ 순간 궁금해졌다. 101호는 큰 방을 살짝 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을 작업실로 사용하는 모양인데 그곳은 무슨 작은 설치박물관인 듯 현란하고 요란스러웠다.

그곳엔 여자 속옷과 여자누드 사진이 어지러이 걸려있었다. 가만 보니 여자누드사진 중에는 102호 모녀도 있었다. 같이 누드모델이 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름 진짜 모델이 된 양 제법 포즈를 취하고 있다. 포즈 중에는 난해한 포즈도 있었다. 104호가 모녀를 농락한 것인지, 모녀의 추악한 욕망이 예술작품으로 탄생하려는 것인지 판단이 쉽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모녀끼리 잘한다. 미친년들이 하나둘이 아니라니까.’ 세상을 비웃듯 시니컬하게 비아냥거렸다. 여자속옷도 멀쩡한 것은 아예 없고 찢겨지거나 페인팅된 것들이었다. 여자속옷과 여자누드사진들이 멋대로 걸려있고 설치되어 있었는데, 좋게 말하면 무슨 입체파 설치아트 같았다. 야릇하면서 동시에 묘했다. 성적 흥분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꼭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미적 흥분이 충만하였다. 세상 어느 명화나 아트도 성적으로 흥분되지 않는 것은 없다. 원래 미술이나 예술의 기원이 성적 흥분에서 비롯되었으니까. 키치냐 아니냐, 예술이냐 저속이냐 하는 것도 그 구분이 쉽지 않지만 당대에선 말할 수 없는 법, 104호의 예술이 딱 그랬다.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적 느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 하는 개인적 취향과 별개로 미적인 흥분은 충만했던 것이다.

101호는 격한 감정으로 104호에게 따지러 들어왔지만, 작품을 보는 짧은 순간 그 생각은 완전 지워졌다. ‘미친놈인 건 분명해. 예술 한다 치고 여자들이나 꾀어 이런 사진이나 찍고 섹스나 즐기는 놈이… 아무튼 빨리 나가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 그 방을 나왔다.

날이 밝았다. 찬란하게 희뿌연 날이. 마을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고 경찰차들이 여러 대 나열해있다. 101호가 수갑을 찬 채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있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우리 마을에… 저런 쳐 죽일 놈.”

마을사람들이 101호에게 손가락질을 해가며 욕을 하고 있다. 곧이어 104호 시신이 가려진 채 들것에 실려 나왔다. 그러자 주위가 더욱 소란해진다. 집 주인이 거든다.

“안 그래도 이 집 부수고 상가 지으려고 했는데… 에이 액땜했네.”

102호 여자는 수사상 경찰과 함께 경찰차에 오른다. 101호를 쳐다본다. ‘이것이 우리 운명이에요. 받아들이세요.’하는 심정으로 그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101호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102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속으로 건넨다.

103호 모녀는 이사 준비에 한창이다. 이 사건을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이사에 열중이다. 104호에게 걸었던 희망을 또 누구에게 걸지 101호가 두 모녀를 쳐다보며 눈빛으로 말을 건넸지만 그녀들은 애써 외면했다. 이사를 하는 모녀의 모습이 햇빛에 부셔 참으로 아름다웠다. 누드사진만큼이나. 104호 방에서 나온 101호의 지문과 발자국, 그리고 목격자들의 증언 등 누가 봐도 104호는 101호가 죽였다. 증거와 진실은 필요 없었다. 104호 살인사건과 102호 성폭행사건의 범인은 무조건 101호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예정되어 있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거부해서도 안 되는…

집주인은 집을 허물고 4층 빌딩을 지었다. 자기들은 4층을 쓰고 아래층은 공인중개사, 학원, 야채가게 등 여러 점포에게 세를 놓았다. 주위환경도 상당히 개선되었다. 모든 것이 이전에 비하면 꽤 많이 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한 겉모습일 뿐이었다. 거기엔 또 다른 101호와 102호, 103호, 104호가 살고 있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2047, 그리고 그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