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고기>
<데몬 헌터스>가 세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가요나 영화를 넘어 음식, 뷰티, 전통 의복, 전통문화 등 ‘K-컬처’가 전 세계 대세를 이루고 있다. 다르게 말해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이 되었지만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 노인 자살률은 1위다. 너무나 흔하게 한국의 어두운 면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너무나 부끄러운 한국의 단면인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영화는 이런 노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흔한 표현의 클리셰를 쓰지 않는다. 다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노인과 고기’가 아니라 ‘사람과 고기’다. 노인을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철저히 객관화시키고 있으면서 노인을 넘어 사람의 존재로 격상시키는 연출을 하고 있다. 아무튼 노인의 문제를 주요 소재로 삼으면서도 관객으로부터 과한 눈물과 연민 대신 철학적 성찰을 하도록 유도하는 연출은 상당히 뛰어나다.
형준(박근형)과 우식(장용)은 한 동네에서 폐지를 주우며 살아가는 노인들이다. 형준은 이 동네 토박이고 우식은 이사 온 지 오래되지 않은 노인이다. 하루는 폐지를 두고 다툼이 생긴다. 그 후 다시 동네에서 폐지를 줍다 만나자 형준이 우식에게 말을 건다. 이를 계기로 우식이 형준 집에 가게 되고 둘은 친하게 된다. 둘은 소고기뭇국을 먹자고 하는데 끓일 줄을 모른다. 그러자 형준은 같은 동네에서 길거리 채소를 파는 할머니 화진(예수정)에게 도움을 청한다. 거절할 듯 했던 화진은 결국 형준 집에 가서 국을 끓여준다. 이 이후 셋은 우식의 제안으로 고깃집을 돌아다니며 무전취식을 한다.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기를 먹고 튈 때면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러다 결국 잡히고 마는데 화진의 손자가 이를 목격한다. 우식은 재판 중 자신들을 역겹게 쳐다보는 판사에게 대들면서 감치당한다. 7일 후 풀려난 우식은 판사의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지 않는다. 보복심이 아니라 갈 데가 없고 먹을 것이 없어 감방행을 선택한 것이다. 영화는 이 와중에 노인들의 과거를 살짝 제시한다. 사연 없는 사람 없지만, 노인들도 젊은 시절 다 의롭고 좋은 사람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영화는 노인의 문제를 넘어 사람의 존재 문제를 다룬다. 이 노인들이 왜 고기를 먹어야 하는지, 왜 고기를 먹으며 무전취식을 하는지, 우리사회의 문제를 담담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신파가 아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면 눈물이 난다. 이것이 진짜 감독의 실력이다. 관객으로부터 눈물만 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한다, 성찰하게 한다. 이 사회가 올바른 사회인가! 왜 노인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하고 죽어야 하는가! 이런 분노와 정의감이 살짝 들다가 끝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20년 뒤 나의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하고 비참하게 만든 것이다. 부자와 빈자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가난한 자는 정말 그들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가난한 자는 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가! 고기를 굽고 먹는 노인들의 모습은 그들의 존재 자체요 노인을 넘어 사람의 기본적인 존재 양식이다. 이런 존재 자체를 영위하기 위해서 그들은 고기를 먹고 튀어야 한다. 그들에겐 무전취식밖에 답이 없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한 노인을 넘어 사람의 존재 모습이고, 존재 양태(모습)를 넘어선 사회의 문제로 치환된다. 누가 그들을 고기 먹고 튀는 노인들로 만들었는가, 라는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젊었을 때 바르고 정의롭게 살지 않았다고 한들 늙어 고기 한 점 먹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다. 어느 선진국에서 이런 노인들이 있을까? 어느 선진국에서 이렇게 노인들을 방치할까? 아마 선진국 중에는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이다. 이것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양극화, 빈부 차이는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고, 사회 전체의 큰 문제로 발전하여 사회가 붕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노인들을 비참하게 보여주지도 않고 연민으로도 보여주지 않는다. 햇볕은 허름한 골방인 우식의 방에도 들고, 그들이 힘겹게 끄는 폐지 수레에도 비춘다. 그들은 스스로를 비참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우울하거나 슬프지도 않다. 영화 내내 노인들을 담은 프레임은 담담하고, 또는 심지어 약간 유쾌하다. 우식이 죽었을 때도 남은 노인네 둘은 결코 울지 않는다. 도리어 허허, 하며 웃는다.
도덕은 개인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도 도덕, 윤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윤리를 개인에게만 요구하는가! 영화는 노인들의 도덕적이지 못한 무전취식 모습을 보여준다. 젊었을 때도 그들은 윤리적이지 않았다. 그러면 사회는 윤리적인가! 윤리적이지 않은 사회가 윤리적이지 않은 노인들을 비판하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윤리적이지 않은, 사회의 가장 비참한 노인들은 사회의 안전망 밖으로 밀려나 있다. 그래서 노인들에게 고기는 사람의 존재이자 고기 먹고 튀는 행위는 그들의 생존본능인 것이다.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이 무전취식을 하는 것과는 완전 다른 문제다. 세 노인들의 무전취식이 결국 발각되었을 때 이 광경을 화진의 손자가 보고 말았다. 고깃집 젊은 주인이 노인들에게 버러지(?) 같다며 심한 말을 하며 타박을 하자, 화진의 손자는 말한다. ‘당신의 이 고깃집도 당신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부모의 돈으로 하는 것 아니냐고!’ 노인들에게 이 젊은 고깃집 사장의 경우처럼 누군가 조금만 도와줬다면 그들이 무전취식을 할까?
<은교>에서 이적요 노인이 말한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받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이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고. 부와 가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부가 순전히 그들의 능력으로 받은 상이 아니듯 누군가의 가난은 그들의 잘못으로 받는 벌이 아닌 것이다! 특히 이 천민자본주의에서는 결단코 부와 가난이 누군가의 능력과 잘못이 아닌 것이다. 부자 중에 정말 정의롭고 법을 지켜 그 부를 이룬 사람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부동산 투기처럼 돈이 돈을 버는 천민자본주의의 잘못된 시스템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마지막에 우식의 죽음 직후 그의 직업을 비로소 드러낸다. 그에게 시를 배웠다며 그의 제자가 유일하게 그의 빈소에 온 것이다. 우식은 시인이었던 것이다. 문인과 예술인을 개취급하는 이 사회의 천민자본주의가 아니었다면 우식은 무전취식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프랑스, 독일처럼 조금만 문인과 예술인을 인정해주고 사회적 제도로 그들을 살게 해준다면 우식이 이렇게 비참하게 무전취식하고 죽지는 않을 것이다. 우식의 시가 영화 끝에 나지막하게 흐른다. 그래도 밤하늘 별이 밝게 빛난다고.
나도 시인이자 인문학 학자인데 참 남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더욱 이 영화의 끝부분에서 눈물이 나도 모르게 스르르 흘렀다. 미래의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너무 가슴이 아팠다. 노인의 가난과 질병, 사회적 고립은 누구의 잘못인가! 정말 이럴 때 딱 맞는 말이 있다. ‘너희들 중 죄 없는 자 이들에게 돌을 던져라!’
개인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