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름 저, 황문수 번역, 문예출판사

by 방정민

사랑의 기술

2.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어머니는 따뜻함이고, 어머니는 음식이며, 어머니는 만족과 안전의 유쾌한 상태다. 이 상태는 프로이트의 용어를 사용하면 자아도취 상태다. 사람과 사물 등 외부의 실재는 신체의 내적 상태를 만족시키든가, 또는 신체의 내적 상채를 실망시키든가 할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어린아이는 성장하고 발달함에 따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게 된다. 어린아이는 다름 많은 사물들을 서로 다른 것으로서, 곧 스스로의 존재를 갖는 것으로서 지각할 줄 알게 된다. 이때는 이 사물들에 명칭을 부여하는 것을 배운다. 동시에 이 사물들을 다룰 줄 알게 된다. 모든 경험은 결정되고 통합되어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경험이 된다. 나는 어머니의 지식이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나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나는 아름답고 칭찬할 만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어머니에게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나는 현재의 나로서 사랑받는다.’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나이기 때문에 사랑받는’것이리라.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이러한 경험은 수동적인 경험이다. 사랑받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다-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현재의 상태’, 곧 어머니의 자식으로 존재하는 것뿐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지복이고 평화이며, 획득할 필요도, 보상도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사랑의 무조건적 성질에도 역시 부정적 측면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이 여기에 없다면 그것은 마치 인생의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린 것과 같다. 어머니의 사랑을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아동발달의 이 단계(8세~10세 이전)에서 아동의 심상에는 새로운 요인, 곧 자신의 행위로써 사랑을 만들어내려는 새로운 감정적 요인이 생긴다. 처음으로 어린이는 어머니(또는 아버지)에게 무엇인가 주려는, 무엇이든-시나 그림, 그 밖의 것들-만들어주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린이의 생활에서 처음으로 사랑의 관념은 사랑받는 것으로부터 사랑하는, 창조적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변한다. 마침내 어린이는 이제 젊은이가 되어 자기 본위성, 곧 다른 사람들을 오직 자신의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극복한다.

다른 사람의 욕구도 자기 자신의 욕구만큼 중요해진다. 사실상 다른 사람들이 더욱 중요해진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욱 만족스러워지고 즐거워진다.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해진다. 사랑함으로써 그는 자아도취와 자기 본위 상태에 의해 이루어진 고독과 고립이라는 감방에서 벗어난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른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사활(死活)과 관련되는 중요성을 차츰 잃게 되고 그 대신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점점 더 중요해진다. 이와 같이 어머니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옮겨가는 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갖는 성질상의 본질적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무조건적이다.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그 애가 특수한 조건을 만족시켜 주었거나 특별한 기대를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머니와 다르다. 어머니는 우리를 탄생시킨 고향이고, 어머니는 자연이고 대지이며 대양이다. 아버지는 이러한 자연적 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생후 몇 년 동안은 어린아이와 거의 관련이 없고, 이 초기 단계에서 어린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중요성은 어머니의 중요성과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연적 세계를 나타내지는 못하지만 인간 존재의 다른 극, 곧 사상, 인공적 사물, 법률과 질서, 훈련, 여행과 모험 등의 세계를 대표한다. 아버지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고 어린아이에게 세계로 들어서는 길을 제시해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기능은 사회적, 경제적 발달과 관련된 기능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유재산이 성립되고 사유재산이 아들에게 상속될 수 있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재산을 남겨줄 만한 아들을 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후계자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아들, 자신과 가장 많이 닮았고 따라서 가장 좋아하게 된 아들을 상속자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원칙은 ‘너는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너는 네 의무를 다하고 있기 때문에, 너는 나를 닮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조건부 사랑에서도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보답을 바라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를 달성하지 못하면 사랑을 잃게 된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사랑의 소극적 측면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본성에는 복종은 주요한 덕이고, 불복종은 중요한 중죄라는 사실이 가로놓여 있다. 따라서 (복종하지 않으면) 그 벌로 아버지의 사랑을 잃게 된다. 적극적 측면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부이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려고 무슨 일인가를 할 수 있고 노력할 수도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처럼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지는 않다.


아버지의 사랑은 원칙과 기대로 인도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위협적이고 권위적이기보다는 참을성이 있고 관대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성장하는 어린아이에게 능력에 대한 확신을 증대시켜야 하고 마침내 어린아이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를 갖고 아버지의 권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결국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그는 어머니다운, 그리고 아버지다운 양심을 갖게 되어야 한다. 어머니다운 양심은 ‘어떠한 악행이나 범죄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 너의 삶과 행복에 대한 나의 소망을 빼앗지는 못한다’고 말하고, 아버지다운 양심은 ‘네가 잘못을 저지르면 너는 네 잘못의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하고 내 마음에 들고 싶으면 너는 너의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숙한 사람은 외부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초자아(super-ego)개념과는 달라서 자기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어머니다운 양심을 간직하고, 자신의 이성과 판단에 아버지다운 양심을 간직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성숙한 사람은 어머니다운 양심과 아버지다운 양심이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데도 이러한 두 양심을 모두 가지고 사랑한다. 그가 오로지 아버지다운 양심만을 간직한다면 그는 난폭하고 잔인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가 오로지 어머니다운 양심만을 간직한다면 그는 판단력을 잃기 쉽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발달을 방해하기 쉽다.

어떤 소년이 애정은 있으나 지나치게 방임하거나 지나치게 간섭을 하는 어머니와 약하고 냉담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은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모든 신경증적 발달의 특징은 한 원칙이, 어머니다운 것이든 아버지다운 것이든, 발달하지 못했거나, 또는-이것은 더욱 심각한 신경증적 발달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이 바깥 사람들에 대해서나, 그의 내면에서의 이러한 역할에 대해서나 혼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강박신경증 등 신경증의 어떤 유형은 아버지에 대한 일방적인 애착을 토대로 해서 생기고, 히스테리나 알코올 중독,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현실적으로 생활에 대처하는 능력이 결여되거나 억압된 또 다른 신경증은 어머니 중심적인 태도에서 생기는 결과임을 알 수 있다.



3. 사랑의 대상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형제애


사랑의 모든 형태의 바탕에 놓여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랑은 ‘형제애’이다. 나는 형제애라는 말로 책임, 보호, 존경, 다른 사람에 대한 지식, 다른 사람의 생명을 촉진하려는 소망 등을 나타내고 있다. 형제애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형제애를 통해 사람들과의 결합과 인간적 유대와 인간적 일치를 경험한다. 형제애는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는 우리의 동일성, 곧 우리는 형제라는 사실을 지각하게 된다. 중심과 중심과의 이러한 관계는-주변과 주변과의 관계와는 달라서-‘중심적 관계’이다. 형제애는 동등한 자 사이의 사랑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동등한 존재라 하더라도 항상 동등하지는 않다. 우리가 인간인 한, 우리에게는 항상 도움이 필요하다. 무력한 인간에 대한 사랑, 가난한 자와 이방인에 대한 사랑은 형제애의 시작이다. 육친을 사랑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 아니다. 짐승도 새끼를 사랑하고 보호한다. 무력한 자는, 그의 생명이 주인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주인을 사랑한다. 무력한 사람들 동정함으로써, 인간은 형제에 대한 사랑을 발달시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도 인간은 도움이 필요한, 곧 약하고 위태로운 자기를 사랑한다. 동정에는 지식과 동일시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모성애


어린아이의 생명과 욕구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이 모성애다. 어린아이의 생명의 긍정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는 어린아이의 생명 유지와 성장에 절대로 필요한 보호와 책임이다. 또 하나는 단순한 생명의 유지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모성애는 어린아이에게 살려고 하는 소망뿐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천천히 길러준다. 어머니와 어린아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이며 이 관계에서 한쪽은 전적으로 도움을 구하고 다른 한쪽은 도움을 준다. 모성애를 최고의 사랑, 모든 감정적 유대 중 가장 거룩한 것으로 여겨온 것은 이러한 이타적이고 비이기적인 성격 때문이다.

우리는 모성애에서 자아도취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어린아이를 아직도 자신의 일부라고 느끼고 있는 한, 어머니의 사랑과 탐닉은 그녀를 자아도취적으로 만족시킨다. 힘 또는 소유에 대한 어머니의 소망에서 또 하나의 동기를 찾아볼 수 있다. 어린아이는 무력하고 어머니의 의지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지배욕과 소유욕을 가진 여자에게는 자연히 만족스러운 대상이 된다.

어린아이는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아이는 결국 완전히 분리된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모성애의 참된 본질은 어린아이의 성장을 돌봐주는 것이며 이것은 그녀로부터 어린아이가 분리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다. 이 점에 성애와는 기본적 차이가 있다. 성애에는 분리된 두 사람이 한몸이 된다. 모성애에서는 한몸이었던 두 사람이 분리된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의 분리를 관용할 뿐 아니라 바라고 후원해주어야 한다. 이 단계에서 모성애는 비이기성, 곧 모든 것을 주면서도 사랑하는 자의 행복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능력을 요구하는 어려운 과업으로 변한다. 또한 이 단계에서 많은 어머니들은 모성애라는 그들의 과업에서 실패를 겪는다. 자아도취적이고 지배욕과 소유욕이 있는 여자는 어린아이가 연약할 때에만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성공할 수 있다. 오직 참으로 사랑할 줄 아는 여자, 받기보다 주는 데서 더 많은 행복을 느끼는 여자, 그녀 자신의 실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여자만이 어린아이가 분리 과정을 밝고 있을 때에도 사랑하는 어머니일 수 있다. 사랑하는 어머니인가 아닌가를 가려내는 시금석은 분리를 견디어낼 수 있는가, 분리된 다음에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애(性愛)


성애는 완전한 융합, 곧 다른 한 사람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성애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며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성애는 아마도 현존하는 사랑의 형태 중 가장 기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우선 성애는 흔히 사랑에 ‘빠진다’는 폭발적인 경험, 곧 그 순간까지도 낯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장벽이 갑자기 무너져버리는 경험과 혼동된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친밀해지는 이런 경험은 본질적으로 오래가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곧 탐구되고 곧 철저히 규명된다. 그들의 경우, 친밀감은 우선 성적 교섭을 통해 확립된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분리를 우선 신체적 분리로 경험하기 때문에 신체적 결합은 분리 상태의 극복을 의미하게 된다. 모든 형태의 친밀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희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타인과의 사랑을 추구하게 된다. 이 타인은 다시금 ‘친밀한’ 사람으로 변하고,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다시금 유쾌하고 강렬하지만, 이 경험은 다시금 차츰 덜 강렬한 것이 되고 마침내 새로운 정복, 새로운 사랑을-언제나 새로운 사랑은 이전의 사랑과는 다르리라는 환상을 품고-바라게 된다. 성적 욕망의 기만적 성격은 이러한 환상에 많은 도움을 준다.


성적 욕망은 강렬한 정서와 쉽게 뒤섞이고, 그것에 의해 쉽게 자극되면 사랑은 강렬한 정서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사랑은 성적 결합의 소망을 일으킬 수 있다. 이 경우, 육체적 관계에는 탐욕이나 정복하려는 또는 정복당하려는 소망은 없고 부드러움이 섞일 뿐이다. 육체적으로 결합하려는 욕망이 사랑에 의해 자극되지 않는다면, 성애가 동시에 형제애가 아니라면, 이러한 욕망은 도취적이며 일시적인 합일 이외의 합일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성애에는, 형제애와 모성애에는 없는 독점욕이 있다. 성애의 이러한 배타적 성격은 좀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흔히 성애의 독점욕은 소유적 애착으로 오해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서로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사랑은 사실은 두 사람 사이의 이기주의다. 그들은 서로를 동일시하는 두 사람이고, 그들은 단일한 개인을 둘로 확대함으로써 분리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들의 합일 경험은 환상이다.

우리는 성애의 중요한 요인, 곧 ‘의지’라는 요인을 무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다. 이것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만일 사랑이 감정일 뿐이라면,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 감정은 생겼다가 사라져버릴 수 있다. 내 행위 속에 판단과 결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내가 이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견해를 고려할 때, 우리는 사랑이 철저하게 의지와 위임의 행위이고 따라서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이 없다는 태도에 도달할 수도 있다. 결혼이 다른 사람에 의해 주선되든, 개인적 선택의 결과이든 일단 결혼이 성립하면 의지의 행위가 사랑의 계속을 보증할 것이다. 이 견해는 인간성과 성애의 역설적 성격을 무시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견해, 곧 성애는 특수한 두 사람 사이의 독특하고 완전히 개인적인 매력이라는 견해와 성애는 의지의 행위에 지니지 않는다는 또 다른 견해는 모두 옳다. 혹은 더욱 절실하게 말하면, 진실은 전자에도 후자에도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한 쉽게 해소될 수 있는 관계라는 사상도, 또한 어떠한 환경 밑에서도 이 관계는 해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도 마찬가지로 잘못이다.


자기애(自己愛)


프로이트는 자기애를 자아도취, 곧 리비도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아도취는 인간 발달에서 매우 초기 단계고, 후에 이 자아도취적 단계로 다시 돌아오는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게 된다. 극단적인 경우에 이 사람은 미치게 된다. 프로이트는 사랑을 리비도의 나타남이라고 보고 리비도는 다른 사람을 향하거나(사랑),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한다(자기애)고 가정한다. 이와 같이 사랑과 자기애는 한쪽이 많을수록 다른 쪽이 줄어든다는 의미에서 상호 배타적이다. 자기애가 나쁘다면 비이기적인 것은 덕이 될 수밖에 없다.

이기심과 자기애의 심리학적 측면을 검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상호 배타적이라고 하는 견해에 나타나 있는 논리적 오류를 강조하지 낳을 수 없다. 만일 나의 이웃을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덕이라면, 나 역시 인간이므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우리의 감정과 태도의 ‘대상’이며,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 대한 태도는 모순되기는커녕, 기본적으로 ‘결합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힘의 실현이고 집중화이다. 사랑에 내포되어 있는 기본적 긍정은 본질적으로 인간 성질의 구현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향하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는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곧 나 자신의 자아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자신의 생명, 행복, 성장, 자유에 대한 긍정’은 ‘우리 자신의 사랑의 능력’, 곧 보호, 존경, 책임, 지식에 근원이 있다. 그는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오직 다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한 것이기는커녕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배려의 결여-이것은 그의 생산성의 결여에 대한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를 공허하게 만들고 좌절시킨다. 그는 필연적으로 불행하며 생활에서 만족을 얻기 위해 초조해하지만 스스로 이 만족의 달성을 가로막고 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진정한 자아를 돌보는 데 실패한 것을 은폐하고 보상을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프로이트는 이기적인 사람은 그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철수시켜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과 같으므로 이기적인 사람은 자아도취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기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한다.

이기심의 본질에 대한 이론은 신경증의 한 증상인 신경증적 ‘비이기주의-이것은 흔히 이 증상만이 아니라 이 증상과 관련된 다른 증상, 곧 억압, 피로, 노동에 있어서의 무능력, 애정 관계에서의 실패 등으로 시달리고 있는 적잖은 사람들에게서 관찰되는 신경증 증상이다-에 대한 정신분석적 경험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자기애에 대한 사상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신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사랑은 분리 상태를 극복하고 합일을 이룩하려는 욕구에서 생긴다. 사실상 신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다른 성질과 측면을 갖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발견되는 차이도 대체로 인간에 대한 사랑의 차이와 동일하다. 모든 유신론적 종교에서는, 그것이 다신론이든 일신론이든, 신은 최고의 가치, 가장 바람직한 선(善)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특별한 의미는 한 사람에게 가장 바람직한 선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신의 개념에 대한 이해는 신을 숭배하는 사람의 성격 구조를 분석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인류의 발달은 자연으로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와 땅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이 탈출한 데에 특징이 있다. 인간 역사의 시초에 인간은 자연과의 본래의 합일로부터 내던져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러한 원초적 결합에 집작하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원초적 결합으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또는 이러한 원초적 결합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찾아낸다.


모계적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모성애의 본질에 대해 이미 말한 것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모든 것을 보호하고 모든 것을 감싼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기 때문에 통제되거나 획득될 수도 없다. 어머니의 사랑이 있으면 사랑받는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 어머니의 사랑이 없으면 상실감과 궁극적인 절망감이 생긴다. 자녀들이 착하고 순종하거나 어머니의 소망과 명령을 실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므로, 어머니의 사랑은 평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만인은 모두 한 어머니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모두 어머니인 대지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평등하다.

인간 진화의 다음 단계는 우리가 철저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 추리나 재구성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단계로, 부계적 단계다. 이 단계에서 어머니는 최고 지위에서 퇴위당하고 아버지가 종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최고 존재가 된다. 부성애의 본질은 아버지가 명령하고 원칙과 법칙을 수립하는 것이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아들의 복종에 달려 있다. 아버지는 가장 자신을 닮고 가장 잘 복종하고 자신의 재산 상속자로서 자기 후계자가 되는데 가장 적합한 아들을 가장 좋아한다. 그 결과 부계사회는 계급 조직적이다. 형제로서의 평등은 경쟁과 상호 투쟁에 굴복한다.

신에 대한 사랑의 성격은 종교의 모계적 및 부계적 측면의 상대적 중요성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종교의 모계적 요소와 부계적 요소의 차이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부계적 측면은 나에게 신을 아버지처럼 사랑하게 한다. 나는 아버지를 올바르고 엄격하게 생각한다. 곧 아버지는 벌을 주고 상을 주며 마침내 나를 그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로 선택할 것이다. 종교의 모계적 측면에서는 나는 신을 가장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사랑한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믿고 있고, 내가 아무리 가난하고 무력하더라도, 내가 아무리 죄를 짓더라도, 어머니는 나를 사랑할 것이고 어머니의 다른 자녀들을 나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며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어머니는 나를 구해주고 구제하고 용서하리라고 믿는다. 말할 것도 없이 신에 대한 나의 사랑과 나에 대한 신의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만일 신이 아버지라면 신은 나를 아들처럼 사랑하고 나는 신을 아버지처럼 사랑한다. 만일 신이 어머니라면 어머니와 나의 사랑은 이러한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인류의 발달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어머니 중심 사회구조로부터 아버지 중심의 사회 구조로 변했으므로 우리는 사랑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주로 부계적 종교의 발달에서 더듬어볼 수 있다. 이러한 발달의 초기 단계에서 우리는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자신의 재산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인간에게 자행하는 전제적이고 질투심 많은 신을 발견한다. 더욱 발달할수록 신은 전제적 부족장의 형태로부터 자애로운 아버지, 자신이 요구해온 원리에 자기 자신도 속박당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한다. 더 나아가 신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신의 원리, 곧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원리의 상징으로 변한다. 신은 진리이고 정의이다. 이런 발달에서 신은 이미 사람이나 남성이나 아버지는 아니다. 신은 현상의 다양성의 배후에 있는 통일 원리의 상징이고 인간 내면에 있는 정신적 종자로부터 피어날 꽃의 상징이다. 신은 이름을 가질 수 없다. 이름은 언제나 한 사물 또한 한 사람, 요컨대 유한한 것을 나타낸다. 신이 사람이 아니고 사물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름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일신론 사상이 성숙해짐에 따라 그 결과는 결국 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때 신은 일신론적 신학에 있어서 잠재적으로 가능한 것, 곧 현상적 우주의 기초에 있는 통일성, 곧 모든 존재의 근거를 가리키는 이름 없는 일자(一者),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침묵자가 된다. 곧 신은 진리가 되고 사랑이 되고 정의가 된다. 내가 인간적인 한 신은 아니다.

신이 아버지인 한, 나는 어린아이다. 나는 전지전능에 대한 자폐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는 아직도 인간으로서의 나의 한계, 나의 무지, 나의 무력함을 깨닫는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나를 구해주고 나를 지켜주고 나에게 벌을 주는 아버지, 내가 복종할 때 나를 좋아하고, 내가 찬미하면 기뻐하고, 내가 복종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적 발달에서 이러한 유아 단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은 매우 분명한 일이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신에 대한 신앙은 도움을 주는 아버지에 대한 신앙-유치한 환상-이다. 몇몇 위대한 인류의 스승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종교의 개념을 극복했어도 이것은 아직도 종교의 지배적 형태다.


일신론적 사상의 논리적 귀결은 ‘신에 대한 학문’, ‘신에 대한 지식’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근본적인 비신학적 견해와 예컨대 초기의 불교나 도교에서 볼 수 있는 비유신론적 체계에는 차이가 있다. 모든 유신론적 체계에서는, 심지어 비신학적ㆍ신비적 체계에서 조차도, 인간을 초월해 있고 인간의 정신적 힘 및 구원과 내적 탄생에 대한 인간의 갈망에 의미와 타당성을 부여하는 정신의 왕국의 실재를 가정하고 있다. 비유신론적 체계에는 인간이 밖에 있거나 인간을 초월해 있는 정신의 왕국은 없다.

신에 대한 사랑의 문제에 대해 또 하나 다른 국면이 제기되며 이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국면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태도의 근본 차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 차이는 논리적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서양 세계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논리적 원리를 지켜왔다. 이 논리학은 A는 A라고 하는 동일률, 모순율(A는 非A가 아니다) 및 배중률(A는 A이면서도 비 A일수는 없고 A도 아니고 비 A도 아닐 수는 없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음 문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관점을 매우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동시에 동일한 관련에서 종속하고 동시에 종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변증법적 반대에 대처하려고 우리가 어떠한 다른 구별을 첨가하든, 이러한 구별을 첨가할 만하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원리 중 가장 확실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대립되는 것이 이른바 ‘역설적 논리학’이다. 역설적 논리학은 A와 비A는 X의 술어로서 상호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정한다. 역설적 논리학은 중국 및 인도의 사상,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에서 현저했고 다음에는 다시 변증법이라는 이름 밑에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이 되었다. 역설적 논리학의 일반 원리는 노자에 의해 명시되고 있다. “엄밀하게 참된 말은 역설적인 것 같다.” 또한 장자에 의해 명시되어 있다. “1은 1이다. 1이 아닌 것도 또한 1이다.” “그것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설적 논리학의 공식들은 긍정적이다. “그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또 하나의 공식은 부정적이다. 노자 철학에서는 역설적 사고의 특징적인 예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볼 수 있다. “무게는 가벼움의 뿌리이고 정지는 운동의 지배자이다.” 혹은 “본래의 과정에 있는 道는 하는 일이 없고 그러므로 하지 않는 일이 없다.” 혹은 “나의 말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쉽다. 그러나 이 말을 알고 이 말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에도 한 사람도 없다.”


노자가 말한 것처럼 “밟고 걸아갈 수 있는 도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도가 아니다. 명명된 이름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 혹은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고 우리는 그것을 ‘한결같은 것’이라고 명명하다. 우리는 그것에 귀 기울이려고 하지만 그것을 듣지 못하고 ‘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명명한다. 우리는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지만 붙잡지 못하고 그것을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세 성질은 기술(記述)의 주어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질을 함께 섞어서 일자를 얻는다.” 같은 사상을 다시 표현하면 “‘도’를 알고 있는 자는 ‘도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고, 도에 대해 언제든 말할 용의를 갖추고 있는 자는 도를 알지 못한다.”

역설적 논리학은 신의 개념과 중요한 관련을 갖고 있다. 신이 궁극적 실재를 의미하는 한, 인간의 정신이 모순에서 실재를 지각하는 한, 신에 대해서는 적극적 진술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모순을 통해서만 실재를 인식할 수 있고 사고를 통해서는 궁극적 실재의 통일성, 곧 일자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역설적 논리학의 스승들은 말한다. 여기서 인간은 ‘사고’에서 대답을 찾아내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고는 단지 사고에 의해서는 궁극적 대답을 얻을 수 없다는 지식에 도달하게 할 뿐이다.

사고의 세계는 역설에 사로잡혀 잇다. 세계를 궁극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고가 아니라 행위에, 곧 일체성의 경험에 있다. 이렇게 해서 역설적 논리학에서는 신에 대한 사랑은 사고를 통한 신에 대한 지식이거나 인간의 신에 대한 사랑에 관한 사상이 아니라, 신과의 일체성을 경험하는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사상은 올바른 생활 방식을 강조하게 된다. 생활 전체, 사소하지만 중요한 온갖 행동은 신에 대한 지식에 바쳐지지만 올바른 사고에 의한 지식이 아니라 올바른 행위에 의한 지식에 바쳐진다. 이 점은 동양의 종교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역설적 논리학의 관점에서 강조점은 사고가 아니라 행위에 놓인다. 이러한 태도에서 몇 가지 다른 결과가 생긴다. 우선 이러한 태도에서 인도나 중국의 종교적 발전에서 볼 수 있는 ‘관용’이 생겼다. 둘째로 역설적 관점은 한편으로는 ‘교의’의 발달, 또 한편으로는 ‘과학’의 발달을 강조하기보다 오히려 인간 개조를 강조하게 되었다. 동양에서 인간의 종교적 관제는 올바르게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고, 또한 집중적인 명상 행위를 통해 일자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반대이다. 올바른 사고의 의해서만 궁극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에, 올바른 행동도 동시에 중요시되기는 했지만, 중요한 강조점은 사고에 놓였다. 종교적 발전 과정에서 이러한 강조로부터 교의의 정형화, 교의의 정형화에 대한 끝없는 논쟁, ‘비신자’ 또는 이교도에 대한 비관용이 생겼다. 더 나아가 종교적 태도의 주요한 목적으로서 ‘신에 대한 신앙’을 강조했다. 사고에 대한 강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사고를 통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관념으로부터 교의만이 아니라 과학도 발생했다. 과학적 사고에서 올바른 사고는 지적 성실성이라는 면에서나 과학적 사고를 실제-다시 말하면 기술-에 응용하는 면에서나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어버이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의 중요한 평행 관계로 되돌아올 수 있다. 어린아이는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린아이는 무력하다고 느끼고, 모든 것을 감싸주는 어머니의 사랑을 요구한다. 다음에 어린아이는 사랑의 새로운 중심으로서 아버지, 곧 사고와 행동의 지도 원리인 아버지를 찾게 된다. 이 단계에서 어린아이의 행동 동기는 아버지의 칭찬을 받고 아버지의 불쾌감을 피하려는 욕구에 있다.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서 그는 보호하고 명령하는 힘으로서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해방된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원리를 확립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

인류 역사에서 우리는 동일한 발달을 보고 또 예상할 수 있다. 곧 어머니인 여신에 대한 무력한 애착으로서의 신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아버지인 남신에 대한 순종적인 애착을 거쳐, 신이 이미 외부적 힘이 아니고 인간이 사랑과 정의의 원리를 자신 속에 흡수하여 인간과 신이 일체가 되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고, 마침내 시적ㆍ상징적 의미로서만 신에 대해 말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현대 종교에서 우리는 초기의 가장 원시적인 발달 단계에서 최고의 발달 단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가 현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이라는 말은 ‘절대무’뿐 아니라 부족장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개인도 자기 자신 속에, 곧 프로이트가 밝힌 바와 같이 자신의 무의식 속에 무력한 갓난아이 이후의 모든 단계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그가 어느 경지까지 성장했는가 하는 것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곧 그의 신에 대한 사랑의 본성이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본성과 대응하고, 더 나아가 그의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성질이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더욱 성숙한 ‘사고’에 의해 은폐되고 합리화됨으로써 흔히 의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사랑은, 직접적으로는 그의 가족과의 관계에 담겨 있지만, 끝까지 분석해보면 그가 사는 사회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만일 사회 구조가 권위-공공연한 권위, 또는 시장과 여론의 익명의 권의-에 복종하는 사회구조라면 그의 신에 대한 개념은 유치하며, 성숙한 단계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성숙한 개념의 씨앗은 일신론적 종교의 역사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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