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암소를 타고

by 방정민

검은 암소를 타고


저녁 어스름을 먹으며 나타나는 암소는

검다

세상이 온통 검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검어진 세상에는 구멍이 없어

암소는 숨을 쉴 수가 없다,

날카롭게 빛났던 한낮의 밝음이

자신의 몸을 베어 암소에게 내어주면

비로소 세상은 고요한 검은 허공을 만들고

암소는 작고 긴 숨으로 세상을 비운다.

허여히 검어진 세상에 검은 암소를 타고

남은 세상 내가 쉴 곳을 찾아보지만

내가 왔던 그 곳은 이미 가득 차 있고

내가 머물 이 곳엔 마음 하나 흘러가지 못하니

가난하고 또 가난해져 갈 곳 조차 잃어버리면

오직 나는 나로 인한 나를 허공에 태워버릴 것이다,

그러면 검은 암소의 울음소리가 길을 형성하고

막혔던 생의 자궁에 맑은 물소리 흘러가니

다하지 못한 내 삶의 시간은

흘러 비워서 갈 곳을 지워버린다.

검은 암소를 타고

길고 오래된 천지 속으로 들어간다

아침이 되어도 세상은

검다, 그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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